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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이에 따라 흩어졌던 이춘영⦁서상렬을 비롯하여 이조승 등 동문들이 속속 영월로 집결하 였으며, 류인석 자신도 주용규 등과 함께 주천을 지나 방림에서 안승우가 이끌고 온 부대 와 합류하여 영월로 들어갔다. 류인석의 급전을 받았던 이조승도 형인 李胄承에게 충주성 정탐의 일을 맡기고 자신은 영월도 들어갔다. 64) 류인석은 2월 3일(음, 12월 20일) 영월의 문루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65) 류인석은 처 음에는 내가 친상을 당한 지 몇 날이 안 되므로 여기서 잠시 머무는 것도 마음이 송구 한데, 하물며 상복을 벗고 종군하여 모진 목숨이 인륜에 거듭 죄를 지을 수 있겠 는가. 그리고 평소에 경서를 강론할 적에는 내가 다소라도 앞선 선배라 하여 감히 제군의 추존을 받았지마는, 군사 일에 이르러서야 털끝만큼인들 비슷이나 한 일이 겠는가. 실로 제군보다 낫지 못하면서 다만 더할 수 없는 죄를 보탤 따름이니 제 군은 그만 두게. 66) 라면서 아직은 喪中이고 또한 經書나 읽는 선비로 군사 일은 문외한이라면서 사양하였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만일 이 일이 중지되면 머리 깎이는 화는 급해지고 길 또한 막혀 나간대도 요동 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간대도 화를 면하지 못하리오니, 선생께서 비록 삼년 상을 온전히 마치려 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인들 그대로 하실 수 있사오리까. 또 일 의 경중을 헤아려 본다면 先王의 大道가 망하는 것과 한 사람의 상주 노릇하는 것과 어느 것이 중하다 하겠습니까. 67) 64) 『호서의병사적』, 「서행일기 약서」, 51쪽. 류인석의 명령에 따라 이주승은 충주향교의 도유사 李壁遠과 지방대 두령 金成漢과 연락을 취해 놓았 다. 실제로 의병이 충주성을 공격할 때 이들의 내응으로 의병은 충주성을 어렵지 않게 점령할 수 있었다 (『호서의병사적』 54쪽). 65) 류인석이 대장에 추대된 일자에 대하여 12월 15일설(「종의록」과 「서행일기」), 12월 20일설(박정수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12월 24일설(『의암집』과 정영원의『피선기초』)이 있다(구완회, 『한말의 제천 의병』, 84쪽). 이 글에서는 박정수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의 기록에 따라 12월 20일설을 따랐다. 그것은 박정수는 류인석과 안승우를 항시 추종했던 인물로, 이 글에서 박정수는 류인석과 안승우의 행적을 일자별로 상세 히 기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구완회 교수는 『의암집』과 정영원의 『피선기초』에 따라 12월 24일설을 따랐다(구완회, 『한말의 제천의병』, 84쪽 참조). 66) 이정규, 「종의록」, 위의 책, 22쪽. 67) 이정규, 「종의록」, 위의 책, 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