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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적은 고지를 근거로 삼아 자못 맹렬히 방어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격렬하게 싸운 후에 친위대는 일시 퇴각했습니다. 제천을 지나 안동으로 향하고 있던 일부가 도 중에 충돌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52) 지평의병은 단양의 장회협에서 친위대와의 제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지평 의병은 삼삼오오 흩어지면서 의진이 갑자기 와해되었다. 전투에 참전한 의병이 주로 지평 의 포수들이었는데, 이들은 저녁식사도 받지 않고 자기들만 수고했다면서 불만을 토로하 였다. 지휘부 역시 이들이 죽령을 넘어가서 군세를 키우자는 말을 옳게 여겨 다음 날인 1 월 23일 풍기에 들어가 의병을 초모하였으나 호응해 오는 이가 없었다. 53) 장충식의 일기 에 의하면, 이날 의병이 ‘渙散’하고 대장 이필희와 서기 원용정이 단신으로 안동으로 향 했다고 한다. 54) 이때 맹영재가 비밀리에 포군들을 불러모았던 것 같다. 55) 후에 류인석 의 병장에 추대된 뒤에 李敏玉을 처단하였는데 이민옥은 맹영재의 부하로 의병이 일어나자 맹영재의 지시를 받고 의병에 따르는 척하면서 의병활동을 방해한 것이 죄목이었다. 56) 이 정규의 「종의록」에서도 군사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대장을 해치고자 하므로 이필희는 도피하고 군사들도 모두 흩어졌다고 하였다. 57) 장회협 전투에서 비록 승리하였지만, 이와 같은 내부의 방해 공작으로 이필희는 단신으 로 안동으로 향하고 전투에 참전했던 의병들은 각기 흩어졌다. 徐相烈은 장충식⦁이필근 등과 함께 서쪽으로 가서 군세를 회복하려고 소백산을 넘어 순흥이 바라보이는 곳에 가는 데 마침 李春永이 포군과 함께 순흥을 향하고 있음을 보고 합류하였다. 서상렬과 이춘영 이 이끄는 의병은 1월 24일(음, 12월 10일) 순흥에 들어가 진을 쳤다. 26일에는 순흥 군 수가 소를 잡아 의병을 대접하였다. 의병은 26일(음. 1월 12일)에 이춘영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고 군병을 통솔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순흥을 떠나 28일에 小川市店에서 유숙하고 29일에 馬芻嶺을 넘어 義豊에 도착하였다. 이때 申芝秀를 만나 동행하였다. 30일에 영춘에 들어갔다. 군수 申兢休의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31일은 春城에서 유숙하고 2월 1일(음, 12월 18일) 영월에 도착하였다. 58) 한편 제천에 유진하여 단양의 장회협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안승우는 단양의 승전보 를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도망갔던 제천군수 金益珍이 관군을 이끌고 제천에 들 52) 김상기 편역, 「재조선공사의 보고」 『일본외교사료관소장 한말의병자료』1, 2001, 2~3쪽. 53) 박정수, 「사실」, 위의 책, 359쪽. 54) 장충식, 일기, 12월 초 9일자. 55) 정영원, 『피선기초』, 1896년 1월 31일조. 56) 박정수,「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67쪽. 57) 李正奎, 앞의 책 21~22쪽. 58) 장충식, 일기, 1895년 12월 10~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