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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군민들은 횃불을 들고 의병을 맞이하였다. 44) 이때 지평의병은 대장 이필희와 중군장 이춘 영 등을 비롯하여 3백여 명에 달했다 한다. 45) 서상렬이 권숙에게 의병에 협조할 것을 권 했으나, 권숙은 오히려 “韓魏公의 손자 중에 侂胄도 있었으니 우리 조상을 들어 말할 것 이 없다.”라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할 수 없이 권숙을 옥에 가두었다. 다음 날 안 승우는 一枝隊를 이끌고 제천으로 돌아와 본진에서 업무를 보았다. 46) 지평의병은 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의병의 첫 전투는 단양의 장회협에서 1월 11일 (음, 12월 8일) 벌어졌다. 장회촌의 이장이 적이 쳐들어옴을 전달해 주었다. 이필희는 장 회협의 서북쪽인 長林으로 진을 옮기고, 이범직은 남쪽 7리 되는 楡橋를 파수하였다. 47) 鄭華鎔은 보병 10여 명을 거느리고 강나루를 파수하였다. 중군장 이춘영은 60명의 포군 을 거느리고 험지에 매복을 하고 대기하였다. 과연 친위대 1개 중대가 청풍 쪽에서부터 단양으로 들어와 이춘영이 매복한 곳으로 들어왔다. 48) 이때가 정오 무렵이었다. 49) 의병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친위대는 수십 명의 사망자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50) 의병은 승 세를 타고 북쪽으로 수십 리를 추격하였으나 날이 저물고 날씨마저 차고 또 의병들도 지 쳐 추격을 중지하였다. 친위대는 짐수레를 모두 버리고 도주하였다. 의병도 한 명이 전사 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51) 이 단양의 전투에 대하여 일본공사 고무라(小村)는 1월 27일 본국의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原州 暴徒의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 당관에서 파견한 자의 보고에 의하면 폭도는 砥平에서 발단되었으며, 그 거두도 역시 지평의 李春永이라 합니다. 春永은 斷髮 令에 격앙하여 군에 있는 포군(사병을 말함) 수백 명을 규합하여 원주로 나아가 관찰부 청사와 군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모두 약탈했습니다. 폭도는 원주에서 3, 4 일 체류하다가 이 달 18일 그 일부는 평창을 지나 경상도로, 또 일부는 제천을 지나 경상도로 향했습니다. 이들이 安東의 폭도와 회합하려 한다고 합니다. (중략) 친위대 1개 중대가 지난 22일 단양 부근에서 약 200명의 폭도와 충돌했습니다. 44)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 의하면, 의병들이 단양에 입성할 때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맞이했다 한다. 45) 지평의병이 단양에 들어온 사실을 장익환은 그의 일기에서 ‘1895년 12우러 5일’자에, 장충식은 1895년 12월 초 6일자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어 하루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에서는 12월 5일 밤을 무릅쓰고 단양으로 들어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5일 밤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46)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57쪽. 47)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58쪽. 48) 친위대의 병력에 대하여 장익환은 12월 8일자 일기에서 200여 명이라고 적고 있으며, 장충식은 그의 일 기 8일자에서 100여 명으로 적고 있다. 49) 박정수, 「사실」, 위의 책, 359쪽. 50) 장충식, 「일기」, 을미년 12월 8일자. 51) 박정수,「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59쪽. 張忠植, 「日記」乙未年(1896) 12월 초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