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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대장 李弼熙군사 徐相烈중군 李春永 선봉 金伯善군무도유사 安承禹 서기 元容正참모 李弼根 지평의병은 이어서 12월 3일자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격문 제목은 ‘檄告八道列邑’이라 하였다. 41) 이들은 격문에서 마침내 갑오년 유월 이십일 밤에 이르러 우리나라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다. 종묘사직은 위기일발인데 송나라 李若水가 欽宗을 껴안은 일을 실행할 자가 누구 며, 당나라 安眞卿처럼 의병 모집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옛날 고구려가 下句麗 로 된 것도 오히려 수치라 이르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정통의 나라가 小日本이 된단 말인가. 아! 통탄할 일이다. (중략) 진실로 위급존망의 때라. 각자가 다 짚자 리에 잠자고 창을 베개 삼아 끓는 물 속이나 불 속이라도 뛰어들어 온 누리가 안 정되게 하여 日月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만이겠는가. 실로 만 세에 말이 있을 것이다. 42) 라면서 전국의 충의지사는 과감히 일어나 의병에 합세하여 삼천리강토를 회복할 것을 호 소하였다. 지평의병은 제천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군세를 확장한 뒤, 1월 19일(음, 12월 5일) 밤 단양으로 들어갔다. 단양이 험준하여 제천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遂庵 權尙夏의 후손인 군수 權潚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기 위해서 였다. 마침 단양에서도 단발령이 내린 후에 張忠植을 중심으로 李正義, 宋之永 등이 의병통문 을 발행하는 등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43) 그러던 차에 지평의병이 들어오자 단양 41) 격문은 立庵 朱庸奎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의병사시말』,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356쪽. 「주한일본공사관기록」권10의 ‘3.기밀각관왕복(24) 기밀제1호 부속서(3)에 이 격문이 게재되어 있다. 「격고 팔도열읍」이라 제목한 이 격문은 말미에 ’乙未十二月初三日 忠淸左道堤川郡 義兵將 李弼熙謹檄‘이라 하 여 1895년 12월 3일 의병장 李弼熙가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류인석은 아직 의병장에 추대되기 전으로 제천의 이정규 집에서 주용규와 함께 만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류인석은 대장에 추대된 뒤에 주용구가 작성한 이 격문을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발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격문의 말미에는 ’乙未十二月 日 堤川 義兵將柳麟錫謹檄‘으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독립운동사자료집』1, 642 쪽). 42) 「창의견문록」『독립운동사자료집』1, 87~88쪽. 43) 張益煥, 「日記」, 을미년 12월 4일,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