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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일병 오십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衝火)하였다더라. 1907년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부자구몰’이라는 제하의 기사이다. 선생 부자가 순국한 지 5일 뒤에 실린 것이다. 위 기사는 일본군대가 선생 부자를 위해할 목적으로 출동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 또 인근 5~6개 동리를 모두 방화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일본군은 선생과 관련된 항일세 력의 근거지까지 철저하게 탄압하려 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군경이 선생의 구 국투쟁에 대해 그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생한 증좌인 셈이다. 당시 일진회 에서는 공공연히 ‘서울 동편 10여 군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 일자(排日者)도 근절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하는데, 항일투쟁과 교회활동의 구심 점으로서 이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선생의 위상과 역할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선생은 결국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자 구 정서와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피체 후 동지들을 대라는 고문을 받았는데, 선생은 의연히 “이 땅에 와서 너희들이 이처럼 무도한 강도질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심하실 줄 아느냐. 동지들을 말한다면 일진회 놈들을 빼고는 모든 백성들이 나의 동지들이다.”라고 하며 오히려 일제의 죄상을 성토했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구정서와 함께 1907년 8월 24일(음 7.16) 총살을 당해 부자가 동시에 순국하고 말았다. 당시 선생은 향년 44세였 고, 구정서는 25세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선생은 일제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 놓이게 되자, 구국투쟁에 온몸을 던졌던 인물이다. 먼저 의병에 투신하여 전선에서 생사를 넘나 들며 분전하였지만, 국운을 돌이킬 수 없었다. 이에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기독교를 과감히 수용하여 교회활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켜 갔다. 유교에서 기독교로 종교와 이념을 바꾸고, 무장투쟁에서 대중구국운동으로 투쟁방략을 과감하게 바꿔 갔던 것이다. 선생은 마침내 교회와 민족 두 가지를 동등한 절대가치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순국, 순교를 감내한 동시대 역사의 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