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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18996, 호 釣隱, 본 전주)를 비롯한 申芝洙(1854~?, 자 靈三, 본 평산)와 원철상(1877~?, 호 荷汀, 본 원주),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명의 동지들과 동행하여 밤중에 안창으 로 달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범직 역시 류인석의 처변삼사를 듣고, ‘自靖을 하려고 하여 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니 차라리 무슨 일을 하다가 사세에 쫒기면 죽을 뿐이다”라며 안 승우와 함께 ’擧義‘하기로 한 지사였다. 26) 지평의병은 처음에는 이춘영이 지휘했던 것 같다. 위 글에 의하면, 이춘영이 칼을 집고 단에 올라 맹세를 짓고 무리를 경계하여 절제를 받게 하고 호령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 보고서에서도 “暴徒는 砥平에서 발단되었으며, 그 巨頭도 역시 지평의 李春永 이라 합니다.” 27) 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춘영이 군사를 지휘하기는 하였으나 자기보다 4년 연장인 안승우가 참여하면서부터 서로 간의 지위가 분명하지 않 았던 것 같다. 『관동창의록』에서는 “안승우가 지평의병을 지휘한다.” 28) 라고 기록되어 있 음은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이러한 둘 간의 문제로 안창에서 대장을 추대하지 못 하고 원주를 거쳐 제천에 입성하여 비로소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춘영이 중군장, 안승우가 軍務都有司라는 다른 의진에 없는 특별한 직임을 맡게 된 듯하다. 이춘영과 안승우는 지평에서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원주의 안창으로 향했다. 그리 고 안창에서 연안김씨인 진사 金思鼎을 總督召募將, 朴雲瑞를 都領將에 임명하고 원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29) 지평에서 의병이 거사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인 근의 주민들은 단발령 후 감히 먼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지평의병의 거사 소식에 크 게 반겼다. 이에 대하여 『안공하사을미창의사실』에서는 지평고을에서 군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추운 겨울에 따뜻한 봄을 맞 는 듯이 반가워했다. 이때 인심이 흉흉하여 집을 버리고, 양식을 싸 가지고 산골 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천 북쪽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비 로소 안정되었다. 30) 라고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다. 물론 의병 당사자의 기록이라 아전인수식의 서술일 수도 있으나, 의병의 당위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안창의 의병진영에 “매일 100여 명씩 따라 붙었다” 31) 라고 하듯이 의병의 세력은 나날이 불어났다. 25) 이정규, 「종의록」, 위의 책, 18쪽. 26) 李正奎, 「종의록」, 17쪽. 27) 김상기 편역, 「재조선공사의 보고」『일본외교사료관소장 한말의병자료』 1, 2001, 3쪽. 28) 민용호, 『관동창의록』, 乙未 12월 2일조. 29) 박정수, 『사실』, 위의 책, 352쪽. 30) 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위의 책, 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