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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구국회의 활동이 일대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은 1905년 11월 통한의 망국 조약인 을사 조약의 늑결이었다. 이 해에 선생은 교회활동과 신앙생활에서도 일대 전기를 맞이하였는 데, 곧 전도사 보임이 그것이다. 이 해에 전도사가 된 선생은 교세확장에 따라 분리 독 립된 이천 구역의 담임을 맡아 이천교회에 부임하였다. 이 무렵 치욕스런 을사조약이 강 제로 체결되자, 항일 적개심이 비등하고 망국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면서 을사조약 반대투 쟁이 거세게 일어나고, 최익현이 거느리던 태인의병과 민종식의 홍주의병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재기한 의병이 항일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시기는 선생이 을미사 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의병에 투신했던 10년 전과 비슷한 총체적 위기상황이 재현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이천·광주·여주 등지를 돌면서 구국회를 기반으로 한 군중집회를 통해 구 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했으며 조약 철회를 촉구하였 다. 또 국권수호를 위한 인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시장 철시(撤市)를 통한 비폭력 저항운 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선생이 구국회의 군중집회에서 특히 열성을 기울였던 것은 일진 회(一進會)의 반민족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일이었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매국적 송병준이 주동이 되어 1904년에 결성한 친일단체 일진회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자금지원 과 비호를 받아 전국적인 친일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일제의 침략에 호응하여 온갖 친일 매국행위를 자행하여 우리 민족의 공적(公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생이 교회활동과 구국투쟁을 열심히 병행해 갈 수 있었던 데는 장남인 구정 서의 조력과 역할이 컸다. 구정서는 1882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흥국(興國)이었 다. 일찍이 부친과 따라 상동교회에 올라와 엡윗청년회에 가입하여 전덕기 목사의 지도 하에 교회활동과 구국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02년 감리교 지방회가 열렸을 때에는 이천 구역을 대표해서 유사의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그해 11월 장춘명․ 김제안 등 교회 유력자들과 함께 권사 직책을 받았다. 그 후 22세 때인 1904년에는 이미 전도사가 되어 서울 동문안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일찍부터 교단의 중요인물로 부상되 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회활동과 더불어 구정서는 부친의 영향 하에 애국 단체 보안회(保安會)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도 활발히 병행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부친을 도와 구국회의 조직과 실무를 맡 아 구국활동을 적극 펼쳐나가고 있었다. 부자(父子)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