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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이근원에게서 나타나는 칭제건원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화서학파 동문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44) 칭제건원 자체가 화이론의 관점에서 명분과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비춰 졌기 때문에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특히 대한제국 성립과정에서 보여준 주체성의 미약한 정도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가졌던 점도 비판의 강도를 더해준 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원은 일제침략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혼란해진 한말의 시대상황에서 처신의 방편으로 류중악과 더불어 ‘守義’의 입장을 견지한 성재 문하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이 시기 두 가지 처신의 방편, 곧 ‘出而扶持’와 ‘處而扶持’를 들고 있다. 항일 의병에 투신한 최익현 과 류인석이 곧 출이부지의 입장을 견지한 경우라면, 이근원은 스스로 류중악과 더불어 처이부지의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양자가 의리상 결코 비중과 의의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45) 이근원의 이와 같은 두 가지 현실대처 방안은 류인석이 제시한 守義⦁擧義⦁自靖 등 세 가지 행동방안, 곧 ‘處變三事’ 가운데 守義⦁擧義와 상통한다. 류인석은 수의와 거의 양 자를 각각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행동방안으로 규정하는 가운데서도, 나아가 긴밀한 연관 성을 가지는 보완관계로 적극적으로 인식하였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도를 위하여 도모함에는 緩急이 있다. 지금 난적(개화파-필자주)과 이적(일제;필 자주)이 강상을 무너뜨리고 인류를 금수로 만들어 華脈⦁聖道가 끊어졌다. 그 급 박함이 이와 같으니 道의 보존을 꾀한즉 안으로는 修身하여 立道에 힘쓸 것이며, 밖으로는 攘禍하여 衛道에 힘써야 한다. 46) 즉, 류인석은 도학을 보존하려면 당시와 같이 절박한 상황하에서는 ‘修身立道’(수의)와 ‘攘禍衛道’(거의)를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고 봄으로써 상호작용의 관계로 인식하였던 것이 다. 이와 같은 류인석의 현실대처 방안은 결국 이근원의 이른바 ‘出而扶持’⦁‘處而扶持’와 동일한 내용과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근원에게 있어서 처의부지(수의)는 존화 양이가 적극적으로 표출된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44) 「年譜」『毅菴集』권55, 부록, 676~677쪽; 「與宋淵齋 別紙」『昭義續編』권1, 278쪽. 45) 「祭恒窩柳伯賢文」『錦溪集』권13, 16쪽. 46) 「서릉김여중용제」『소의신편』권3, 110쪽. “爲道謨 謨有緩急 當今亂賊夷? 壞滅鋼常 禽獸人類 爲之絶 華脈聖道 其急若此 爲謨道存 則內務修身以立道 外務攘禍以衛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