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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 이근원은 가평 조종암과 함께 여주 大老祠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크게 부각시키며, 정신 적인 지주로 삼고 있었다. 우암 송시열을 봉안하는 대로사가 곧 의리와 명분에 철저한 존 화양이 정신 구현의 상징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 2월 이근원은 처음으로 대로 사를 찾아 송시열의 영정에 참배하였다. 이후 그는 無時로 대로사를 출입하며 분향참배 외에 강회를 개최하는 등 이 곳을 활동 근거지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이근원은 나아가 대로사 운영에도 깊숙이 관계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1912년 6월 여흥민씨의 유력가로 院長에 재임중이던 丹雲 閔丙承의 천거로 대로사 원장 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기도 하였다. 이근원은 이때 “일찍이 重臣이 맡아온 원장 직임 을 일개 유생이 당할 것인가”라며 固辭하였다고 한다. 38) 실제로 이 무렵 그의 문인들이 대로사 임원의 요직에 포진해 있었다. 원장 閔丙承을 비롯해 千洛龜가 掌議, 元極常이 有司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39) 이듬해 4월에도 院任을 다시 사양하였으며, 그의 나이 75세 된던 1914년 1월에는 대로사 都有司 제의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1914년 수 원 闕里社 도유사에도 薦望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1917년 2월에는 太極敎 楊平支部 校 長帖이 도착하였지만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40) 이근원은 필생 마지막 사업으로 『宋子大全』 초록본을 만드는 일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15에는 문인 尹正學(1867~?)과 申益均(1879~1939)으로 하여금 방대한 『송자대전』 가 운데 切要한 부분만 발췌해, 전 10권으로 『宋書略選』을 편집하였다. 이처럼 이근원이 대 로사와 『송자대전』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등 우암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경도된 사실은 존 화양이론을 생명으로 한 화서학파 학문 요체를 체인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이근원은 1918년에 79세를 일기로 鄕弟에서 서거하였다. 한편, 이근원의 학문과 사상은 화서학파의 학문 要諦에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의 핵심도 역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론에 있었다. 이근원은 화서 문하에 입문한 뒤 그의 나이 30대에 해당하는 1870년대에 이와 같은 존화양이론을 근간으로 한 그의 학문 요체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저술된 여러 글들이 대개 이러한 정신에 깊이 경도되 어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41) 이 시기는 1866년 병인양요 이후 1876년 개항을 전후한 시기로 제국주의가 조선에 충 격을 가함으로써 대외위기의식이 극도로 고조되어 가던 때이다. 유생의 신분으로 전통 道 38) 「年譜」『錦溪集』권18, 부록, 17쪽. 39) 千洛龜,, 「錦翁辭大老祠院長任命書」(任子六月吉)⦁「靑天日記」『鄒東散筆』 40) 「年譜」『錦溪集』권18, 부록, 18~19쪽. 41) 「年譜」『錦溪集』권18,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