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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지만 자료상의 정황으로 보아, 40대에 접어드는 1880년대 초반이 되면 그 문하에 인근의 청년자제들이 모여든 것으로 보인다. 1881년 2월에 처음으로 향리에서 “諸生과 더불어 강회를 열었다”고 한 기록을 통해 그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33) 이때부터 그는 향리 에서 인근 지역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相見禮를 갖기도 하고, 鄕飮禮를 열어 학문을 토론 하며 서로간의 情誼를 두텁게 하였다. 또한 李根壽 등의 동문사우 및 문인들과 함께 화양 동 萬東廟를 참배하거나 중암과 성재를 수시로 찾아가 학문 탐구에 전심하게 된다. 이근원은 1895년 전후 격변하던 정국의 와중에도 비교적 초연하게 일관된 도학자의 길 을 걸었다. 1876년 개항 이래로 대한침략을 집요하게 추진해온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발발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갑오경장을 추진하면서 한국침략 야욕을 노골적 으로 드러냈다. 결국 1895년에 들어와 變服令과 민비시해, 그리고 단발령을 계기로 성재 문하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유인석을 정점으로 전 문파의 역량을 경주해 의병을 일으켜 민 족 聖戰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근원은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직접 의병의 전열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근원은 이 시기 류인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의병에 동참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지 모도 없고 용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身病이 더 이상 지독할 수가 없어 자리를 뜨지 못해 감히 싸움터에 나설 마음을 먹지 못하니, 심히 부끄럽다” 34) 라고 하여, 심한 병 때문이었 다고 밝혔다. 한편, 금계의 문인인 廣菴 李奎顯(1874~1951)이 지은 금계의 행장에서는 이근원이 의병 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명확히 언급하지 않고, 다만 “출병으로 扶持하는 것이나 處守로 扶持하는 것이나 한 가지 義諦”라고 언급하였을 따름이다. 35) 이렇게 볼 때 이근원이 의 병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처신의 방편을 같이한 류중악과 함께 문파의 전력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06년에 들어와 이근원은 義兵 모의 혐의로 여주헌병대에 구금되어 한때 고초를 겪기 도 하였다. 36) 이때 이근원은 헌병대장에게 “지금 뉘라서 倡義할 마음이 없겠는가. 다만 꾀와 힘이 없어 일어나지 못할 따름이다. 지금 나에게 훌륭한 이름(倡義 ; 필자주)을 더했 으니 가히 老年의 영광이라 이를지다.” 37)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33) 「年譜」『錦溪集』권18, 부록, 7쪽. 34) 「年譜」乙未年條『錦溪集』권18 부록, 12쪽. “與毅菴書于堤川陳 書略曰 (中略) 元(李根元-筆者)也 非 惟無謨無勇 不能有爲身病比復添劇 不離床第 不敢有杖劒之心 甚可愧也” 35) 「年譜」『錦溪集』권18, 부록, 28쪽. “先生 以爲出而扶持 與處而扶持 同一義諦” 36) 「驪江錄」(朴廷和 作)『錦溪集』권18, 부록. 37) 「年譜」『錦溪集』권18, 부록,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