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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하였다. 그리하여 화서 연원의 여러 문인들은 화맥의 수호를 필생의 과제로 설정하게 되 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하에 이들은 을미의병 활동 이후 1898년 서간도 망명지에서 다 음과 같은 「義諦」를 약정하기에 이르렀다. 만고의 화맥이 다해진 나머지에 천신만고로 그 전형을 겨우 보전하여 華夏의 회 복을 기다림이 진실로 우리 마음이기에, 비록 하루 화하를 더하더라도 마는 것보 다는 낫다. 이로써 心法을 지키는 법을 삼아 옛날 우암(송시열) 문하에서 전수한 ‘忍痛含寃 迫不得己’ 8자의 의미에 그윽히 비기노라. 23) 이들이 1895년 을미의병을 일으킨 이후 그때까지 ‘천신만고’를 겪어오면서도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얼마나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는지는 위의 「義諦」를 통해서도 충분히 짐 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일제와 투쟁하면서 살겠다는 강렬한 항일신 념이 투영되어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론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역사적인 상황이 변천하 게 되자 여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실천을 전제로 한 이론체계 이다. 다시 말해 1895년 의병 참여 이전에 전개되었던 이항로의 존화양이론이 어디까지 나 이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데 비하여, 擧義 인물들의 존화양이론은 소중화론 등 과 같은 화서의 이론을 철저히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투쟁, 서간도 망명을 거치는 동안 그 이론이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면서 강력한 실천논리를 표방하게 되었던 것이 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서학파 존화양이론의 특징이다. 2) 華夷人獸論 위정척사는 조선 말기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 전후로부터 주도적인 국론이 되었다.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한 시대상황에서 전개된 위정척사론은 敎 學的 역할을 넘어서 민족의 전통과 국가를 수호하려는 反帝斥和를 주창하게 되었다. 위정 23) 「再入遼東約定義諦」『昭義新編』권3, 76쪽. “萬古華夏一脈 墜盡之餘 千辛萬苦 準保其典型 以待來復 固其 心也 雖加一日 愈於巳 以此爲固守心法之計 竊附昔日尤門傳授 忍痛含寃 迫不得巳 入字之意也”; 再入遼 東約定義諦」『昭義新編』권3, 76쪽. “萬古華夏一脈 墜盡之餘 千辛萬苦 準保其典型 以待來復 固其心也 雖加一日 愈於巳 以此爲固守心法之計 竊附昔日尤門傳授 忍痛含寃 迫不得巳 入字之意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