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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곧 ‘화’가 제왕의 承統과 성현의 淵源을 비롯하여 예악문물의 실체를 통칭하는 것인데 반하여, ‘이’는 ‘화’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처럼 至善極美한 영역의 ‘화’를 항상 파괴하려 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이면에는 ‘화’와 ‘이’가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상호 투쟁관계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서학파가 존화양이의 역사적 당 위성과 필연성을 역설하게 되는 근본 입지는 바로 이와 같은 논리에 있었다. 한편, 조선을 침범해 오던 제국주의 ‘洋倭’에 대해 화서학파의 인물들은 전통적 오랑캐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문명 수호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이’로 인식하였다. 그 러므로 이처럼 교활한 ‘양왜’가 소중화의 조선을 침범하는 시대상황은 곧 미증유의 대변 란이었다. 그 변란은 ‘인류’ 문명의 실체인 ‘화’의 존폐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 다. 결국 화서문파의 인물들은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시대적 고통을 국망과 親喪으로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절실하다고 느끼고 있다. 곧 화맥의 단절을 국망⦁친상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은 ‘화’의 가치를 국가와 민족의 가치 수준을 넘어선 절대적 인 상위 개념으로 규정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와 민족은 오직 ‘화’를 보전한 상태에서만 가능하게 되고, ‘화’가 단절된 상태의 국가와 민족은 차원을 달 리하여 그 의미가 변질되고 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국가와 민족보다 도 ‘화’를 더욱 강조하였던 논리가 결코 맹목적인 慕華思想의 발로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다. 화서학파의 인물들은 존화양이의 견지에서 개화파에 대해서 극도의 증오감을 갖고 있었 다. 이들이 ‘소중화’의 조선을 ‘小洋’ 혹은 ‘小倭’로 전락시켰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소중화가 소양⦁소왜로 전락한 것은 국내의 개화파가 일제 침략세력과 결 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양⦁소왜로 전락한 조선은 이제 綱常과 禮樂이 멸절되어 오랑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도 ‘금수’로 전락해 버렸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상황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나라가 오랑캐 나라로 된 채로 유지 된다면, 차라리 화를 견지한 상태에서 망하는 게 낫고, 사람이 금수가 된 채 살아간다면 차라리 인간으로 죽는 것이 낫다”라고 절규하였던 것이다. 22) 이로써 본다면, 화서학파의 인물들은 적어도 華夷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결코 허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서학파의 인물들은 인류 역사의 속성으로 보아 화맥과 인류는 단절될 수 없다고 확신 22) 「答閔士人龍鎬書」『昭義新編』권3,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