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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장항전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고, 또 향후 항일전을 모색하고 구상하는 과 정에서 지도부 간에 이견이 생겨 상호 갈등이 야기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하락의 기록에 감은리 승전 이후 수정사로 행군하여 후속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는 선생의 활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점도 이런 정황 때문인 듯하다.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여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선생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제헌국회의원이기도 한 원용한(元容漢, 1877-1959) 목사의 회고에 의 하면, ‘모든 생각과 계획을 일소하시고 춘몽을 깨신 듯이’ 1897년 2월 스스로 서울 남대 문의 상동교회로 스크랜턴(W.B. Scranton) 목사를 찾아가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3년이 지난 1899년 3월 선생은 이천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마장면 덕평리의 덕 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기까지 3년 동안 선생은 신앙활 동과 구국투쟁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를 현실적으로 조화시켜 가는 문제로 인해 심 한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천지역에서 활동한 감리교 선교사의 1902년 한 보 고서에서 “구춘경은 덕들교회에서 처음 학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우리를 돕는 매서인 (賣書人)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사람이었다. 그는 덕들에서 학습을 받기 전 이미 3 년 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는 그리스도 복음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하심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신앙을 고 백하는 교인의 대표적인 예였다.”라고 기록한 대목이 이러한 정황을 잘 드러내주고 있 다. 구국을 향한 의지와 열정은 선생이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의 신앙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은 스웨어러(W. C. Swearer, 한국명 서 원보) 감리교 선교사로, 그는 바로 이천지역 초기 기독교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서원보 는 선생이 이천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기간이기도 한 1898년부터 1907년까지 10년 동안 이천지역 감리교 책임자였다. 이 기간에 선생은 그를 도와 교회설립과 선교활동을 열정 적으로 펼쳤다. 세례 이후 선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집에다 노루목교회를 세웠는데, 집 앞에다 장대 끝에 십자가를 달아 세워놓고 예 배를 보았다고 한다. 선생은 오랜 인습에 젖은 주변 사람들로 인해 선교과정에 많은 어 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상민과 노복들에게도 존칭을 쓰는 등 파격 적인 언행으로 말미암아 문중 어른들의 노여움을 사서 집안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을 정도 였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의병 시절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여러 동지들이 그 를 따라 기독교로 전향함으로써 이후 기독교 전파와 구국회 운동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 어 주었다. 이처럼 신앙활동에 열성적이던 선생은 1902년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