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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욱 위급해져 갔다. 마침 독일인 요관(要官) 중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무기를 빌려 받을 것을 약속하고, 민모(閔某)와 함께 의논 독일에 갈 것을 꾀하였으나, 민의 위약으로 실패 하고 말았다. 한편 그는 최익현(崔益鉉)・김학진(金鶴鎭)과 더불어 격문을 살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김(金)은 하루, 최(崔)는 이틀 만에 석방되었으나, 그는 4개월 동안 일본사령부(日本司令部)에서 온갖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시 소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다. 서울을 떠나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 두대동(頭大洞) 에 은거하였다. 그러는 중에 5조약(五條約)이 맺어졌다.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1907년 4월 어느 사람이 와서 임금의 글을 전했다. 거기에는 다만 거의(擧義)라는 두 글 자가 써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것이 곧 의대조(衣帶詔)이다. 이미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융희 원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고, 7조약(七條約)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抱川)・연천(漣川)・적성(積成)・ 삭녕(朔寧)・철원(鐵原)・양주(楊州) 등지에서 벌려 세워 강화(江華)를 향해 내려갔다. 이 때 부하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 등이 여러 번 적진을 깨뜨리니 경기의병의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에 국내의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양주(楊州)에서 모이 니 군대가 도합 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을 삼고, 허위는 군사장(軍師長), 즉 작전참모가 되었다. 그간의 전력을 통해 그의 병술(兵術)과 전략이 뛰어났음이 인정된 것이다. 이인영의 헌병조서에 보면 이때 양주에 집결한 13도 의병장 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 문태수(文泰洙)(일명 문태현(文泰 鉉)),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충청) 이강년(李康秊),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강 원) 민긍호(閔肯鎬),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경상) 신돌석(申乭石), 관서창의대장(關 西倡義大將)(함경) 방인관(方仁貫),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경기・황해) 허위(許蔿) 등이다. 즉, 허위는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으로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 병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허위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해 각 의병대가 분산하여 서울로 향하되, 같은 날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기약되어 있었 다. 이리하여 허위는 몸소 결사대 삼백 명을 인솔하고 서울 성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 고, 이어 다른 부대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전에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대한매일신보」같은 신문은 이 일이 있기 이미 두 달 반 전에 이를 크게 보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대비책은 철저하여 그들은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했 다. 이 같은 삼엄한 일본군 수비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일부병력은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 밖에 이르렀다. 그런데 허위의 선착부대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마침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뒷일을 허위에게 부탁하고 귀 향하니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1908년 2월 28일 음력 1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