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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공훈록> 허위(許蔿) 1854. 4. 1~1908. 9. 27 호:왕산(旺山) 자:계형(季馨)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 출신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경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화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 이었다. 1897년 3월 이은찬(李殷贊)・진사 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거 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장으로 삼아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여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의 병기(兵器)를 압수 해서 금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의병을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을 발송해서 군사를 모집 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을 굳히기도 전에 대구의 관병이 성주를 치고, 이어서 경성과 공 주의 관병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를 사로잡아 갔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진 천(鎭川)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의병 을 해산시키라 권고하므로 부득이 장졸들을 타일러 제 고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호남 삼월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그 이후 세상을 등질 뜻을 갖고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공적개요 1. 1896년 3월 金山義陣에 참여하여 같은 해 4월 參謀長에 임명되어 활 동하였다. 2. 1905년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는 격문을 배포했다가 같은 해 3월 체 포되어 4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구속되었다. 3. 1907년 일제에 의해 大韓帝國 군대가 해산되자 같은 해 9월 경기 연 천, 적성, 강원 철원 등지에서 義陣을 구성하여 일본군과 전투하고 附日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11월 李麟榮 등 전국 각지 의병장들과 함께 13도연 합의병부대(일명 十三道倡義大陣所)를 구성하고 軍事將에 임명되어 1908 년 1월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총대장 李麟榮이 부친상으 로 대장직을 사퇴한 뒤에는 실질적으로 13도연합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군 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4. 1908년 6월 영평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