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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공훈록> 한원태(韓元泰) (1881)~미상 평남 영변(寧邊) 사람이다. 이인영(李麟榮) 의진에 가담하여 경상・충청・경기・황해도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4~5년 간의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 여 갔다. 이후 1907년에 이르면 다시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 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 들은 의병을 다시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이 같은 시기에 충청도 충주(忠州) 노은면(老隱面) 사금광에서 채광에 종사하고 있던 한 원태는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7년 음력 8월 이인영 의 진의 선봉장 정봉준 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의진의 종사(從事) 로서 경북 문경(聞慶)・청풍(淸風), 강원 원주(原州), 경기 여주(驪州)・지평(砥平) 등지에 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같은 해 9월 충북 충주군 과현(果峴)에서 동지 40~50명과 함께 일본군과 교 전하였고, 이후 황해도 토산군(兎山郡) 황곡(黃谷)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의진이 붕 괴되자 잔존 병력을 수습하여 정봉준과 함께 원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기도 포천(抱川) 으로 들어가 1908년 음력 정월 초 이인영의 좌군장(左軍將) 신명재(申明在)에게 투신하 여 종사의 일을 맡았다. 그러다가 같은 해 음력 2월 8일 김창식(金昌植)과 같이 양총 25 자루를 구입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갔다가 피체되어 1908년 6월 6일 평리원에서 유형 15 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719~720. 註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123~125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