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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공훈록> 한상열(韓相烈) 1876. 4. 2~1908 자:文極 이명:相說 한상열은 동수(東洙)의 장남으로서 강원도 횡성(橫城) 출신이다. 1907년 8월 구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우국지사 한상열은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어 거 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하였 다. 부하 약 이백 명(세력이 가장 강하였을 때는 1,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을 거느리 고 지평・홍천・원주・평창・영월 등지에서 왜적과 교전하기를 무려 5백여 차례에 이르 렀다. 1907년 10월에 이르러 전국의 해산병들이 기존의 의진과 합세하여 자못 성세를 이루어가자 10월 31일에 한갑복(韓甲復)・민긍호(閔肯鎬)・이인영(李麟榮)・여용서(余龍 瑞)・장모(張某)・심상희(沈相熙) 등 의병장이 거느리는 의진이 횡성과 지평간에 있는 모 고곡(毛古谷) 일대에 집합하여 8천여 명의 연합의진이 형성되어 유기적 의병활동을 전개 할 수 있었다. 특히 군사경험이 있는 해산병들이 흡수되었으므로 의병활동도 다소 기동 성 있게 전개된 점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08년 2월에 홍천에서 일본의 대부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시켰으며 이에 적은 횡성의 일본 수비대를 파견하여 4월 2일 홍주군 월운면 서북후동(月雲面 西北後洞)에 거주하는 한상열의 처자를 납치하여 귀순할 것을 종용하고자 각종의 유인・협박을 가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오히려 20일에 군 사를 거느리고 횡성을 습격하여 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와 경상북도에 걸쳐 가장 강렬하게 일군과 대항하던 민긍호 의병장이 종말을 고한 1908년 8월을 전후 하여 한상열(韓相烈)은 임형순(任馨順), 이연년(李延秊)・한갑복(韓甲福) 등과 함께 장렬 하게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959~960. 註ㆍ梅泉野錄 452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483,533面 ㆍ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3卷 585, 599, 73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