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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하지만 전투 때마다 지리적으로 우세한 의병 측에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관군은 기 습작전을 펴기도 하고 화공을 계획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공략전을 벌였으나, 그때마다 의병의 반격으로 번번이 격퇴당해 성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산성을 사이에 두고 의병과 관군 간 대치가 계속되는 동안 의병 측에서는 서울 진공을 목표로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설정해 가고 있었다. 서울 진공은 실제로 많은 의진들이 표 방하고 있었던 구호이지만, 대개의 경우 그 실현 가능성은 미약하던 실정이었다. 하지만, 남한산성의병의 경우에는 강력한 전력면에서나 서울에 근접한 지리적 위치면에서 볼 때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 다. 그러나 의진의 서울진공 계획은 4월 3일(음 2.21)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중단되고 말았 다. 철옹성과 같던 남한산성 공략이 여의치 않자, 관군 측에서는 비밀리에 김귀성을 통해 박준영을 매수하였던 것이다. 즉, 귀순하는 경우에 박준영에게는 광주유수를, 김귀성에게 는 수원유수를 제수한다는 미끼로서 이들을 매수한 것이다. 관군에 매수된 이들은 전날 저녁 전군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회식연을 성대히 벌였다. 그의 흉계를 눈치 채지 못한 의병들은 만취가 되어 깊은 잠에 빠졌으며, 각 성문의 파수를 맡았던 군사들조차 대취하 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이미 정해진 계획에 따라 박준영이 서문과 북문을 열자 문 밖에 서 대기 중이던 관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시에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당황한 의병들은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소란스런 와중에도 배신행위 가 드러난 박준영은 두 아들과 함께 의병들에게 총살되었다고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이 날의 수성전에서 의병들은 보여준 감투는 놀라웠다. 당시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한 전군장 김태원이 남긴 다음 기록을 통해 서 이러한 정황이 확인된다. 적병은 일제히 산에 올랐고 서로 공격하였는데 어둠이 칠흑과 같았고 동서가 구분되지 않 았다. 삼경부터 날이 밝기까지 큰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죽은 병 사와 군마의 수가 5백 명이었고, 적병의 죽은 자가 3백 명이었다. 이에 포위망을 뚫고 동쪽 으로 탈출하여 싸우며 행군하였는데, 처음 성 밖으로 나갔을 때 따르는 군사가 4백 명이었 다. 이처럼 의병은 남한산성을 점거한 지 한 달 만에 관군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말았으며, 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동안 쌓아놓은 인적, 물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어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선생을 비롯한 잔여 의병들이 영남지방으로 내려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