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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남한산성 점거 이 무렵 광주 일대에서는 이천 연합의진과는 별도로 심진원(沈鎭元, 혹은 沈鑏澤)을 주 장으로 삼고 일어난 일단의 의병이 활동하고 있었다.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도 이 무렵 의병에 의해 처단되었을 만큼 성세를 떨쳤다. 그리고 심진원의 광주의병은 이천 연합의진 에 앞서 2월 23일 남한산성을 장악하여 활동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소수에 불과 한 광주의병은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의 인솔하에 서울에서 출동한 관군 800명의 공 세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심진원은 이천 연합의진에 서한을 보내 합세를 요 청하였고, 여기에 호응하여 이천 연합의진은 2월 28일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으 로 들어가 광주의병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동경조일신문은 의병의 남한산성 점거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남한산성 안의 적(의병) 수는 약 1천6백 명이다. 그 가운데 1천여 명은 광주․이천, 그리고 양근(양평)의 포군, 즉 구 지방병이고, 그 나머지 6백 명은 광주의 농민이다. 적의 수괴(의병 장)는 광주의병장 심영택, 이천의병장 박주영(朴周英, 박준영), 양근의병장 이석용(李錫容) 등 3명이다. 위의 기사를 통해 남한산성에 모인 연합의병 가운데 근간이 되는 병력은 광주의 포군과 농민이며, 이천과 양평에서도 많은 의병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 점령 후 의진 지휘부에서는 적의 내습에 대비해 요처마다 군사를 배치하고 수 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선봉장 김태원은 남문을, 후군장 신용희는 북문을, 우익장 김경성 은 서문을, 좌익장 김귀성은 동문을 각각 파수케 하였고, 그리고 의진의 본부가 있는 중 앙부는 중군장인 선생이 맡아 지켰다. 이천 연합의진이 광주의병과 연합하여 수도 서울의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점거하 게 되자, 일제는 큰 충격을 받고 이를 탄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다급해진 일제 는 정부로 하여금 강화도에 주둔하던 정예 관군 300여 명을 남한산성으로 증파하면서 성 을 에워싼 채 의병을 더욱 압박하였다. 이때의 포위상황을 보면 성 안의 의병 2천 명에 대하여 관군은 친위대와 강화병을 합하여 3개 중대와 2개 소대로, 지휘소를 남문 밖 매착 동(梅着洞)에다 설치하고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동문 밖 불당곡(佛堂谷)과 향교 리(鄕校里)에 각 1개 중대, 서문 밖 석회당(石會堂)과 동문쪽 엄현리(奄峴里)에 각 1개 소 대를 분산 배치하고 군수미 보급로를 차단하며 포위공격의 태세를 취하였다. 성 안의 의병과 성 밖의 관군 간에는 연일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