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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공훈록> 서울 사람이다. 처음에는 정철하(鄭喆夏) 의진, 나중에는 전해산(全海山) 의진에 가 담하여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 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및「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실 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 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 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 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대한제국 근위병(近衛兵) 참위(參尉) 출신인 정원집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 음력 9 월 10일 동지 이봉래(李鳳來)와 함께 정철하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 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 광주군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같은 해 11월 30일 평리원에서 유형 10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08년 6월 유배지인 전라도 지도(智島)에서 탈출하여 이후 전남 광주(光州)·함평(咸平)·나주(羅州)·장성(長 城)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전해산 의병진에 참여하여 7월 29일 선봉장(先鋒將)으로 활약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당시 전해산 의병장이 「본 고을 반당(反黨)에 게 보내는 격문」에 "아! 천하의 대의는 3가지가 있으니 하나만 빠져도 사람이 사람 되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 되지 못한다. (중략) 요즘 군의 형세가 차츰 떨어지고 이로 운 깃발이 날로 날리니, (중략) 나도 정원집과 더불어 수십여 진을 규합하여 산과 바 다로 횡행하고 있다"고 쓰여 있는 점을 보면 의병진에서의 정원집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8월 13일 이래 함평 지방을 중심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그 앞잡이를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적을 처단하였고, 1909년 1월 말 의 병의 진을 나누어 나주 고막원(古幕院)에 있는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였다. 이때 그는 의병들과 약속하기를 내가 혼자 들어가서 일이 여의하면 나올 것이고 일이 여의치 못하면 포를 놓을 터이니 포 소리를 듣거든 일제히 쏘라"고 지시하였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부하의 오발로 인해 부상, 귀대하였다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ㆍ한국독립사(김승학)하권 263·264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484·594면 ㆍ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제2집373·401·410·422·423·439·440·448∼ 450·646·660·66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13·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