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page

327 寅) 의진과 합진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12월 상업산(祥業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 다. 그리고 그는 1908년 1월 다시 김학선 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같은 해 음력 5월 초 충주 노은리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8년 7월 31일 평리원에서 유형 15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511. 註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341・342面 3. 판결문 등 판결문 요약 판결문 성명 정시항(鄭時恒) 피고 정시항(鄭時恒)과 피고 김성구(金聖九)와 피고 손명선(孫明善)의 내란 안건을 검사 공소에 의하여 이를 심리하니 피고 정시항(鄭時恒)은 음력 작년 7월경에 음성 금왕에서 노동을 하고 있던 중 무리 30~40명을 거느린 정봉준(鄭奉俊)이 와서 역부 등을 강제로 들어오게 하여 무리가 140~150명에 이르렀다. 피고가 따라다니다가 동년 8월초에 충주 노은에서 일본병사와 교전하다가 패하여 도주하고 동월 15일경에 음성, 사장(사장) 등지 에서 일본병사와 교전하여 또 패하여 도주한 바 두 차례 교전에 그 무리 중 남자 4명, 여자 1명이 사망하고 일본병사는 사상자가 없었다고 하며, 원주로 물러가서 정낙인(鄭樂 寅), 방인관(方仁觀), 원용진(元容振) 등과 같이 진(陣)을 합하니 무리가 약4~500명이라 동년 12월경에 군 뒤편 상업산(祥業山)에서 일병의 습격을 받아 전투에서 패하여 남은 무리가 겨우 40~50명인데 20명가량은 정봉준이 거느리고 가고 그 나머지는 각자 흩어졌 이름/별명정시항(鄭時恒) 당시나이42세 본적/주소충북 충주군판결기관 평리원 죄 명내란생산년도1906 주 문유(流) 15년판결날짜1908.07.31 사건개요 도당 3,40명을 거느린 정봉준의 부하가 되어 충주 노은면, 음성시장 등에서 일병과 교전하였다. (정낙인과 함께 지평에서도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