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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2. 공적조서 및 공훈록 <공적조서> <공훈록> 정시항(鄭時恒) (1867)~미상 충북 충주(忠州) 사람이다. 정봉준(鄭鳳俊)・김학선(金學善) 의진에 가담하여 충청도와 강원도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 일 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충청도 음성(陰城) 금광에서 광부로 일하던 정시항은 이 같은 시기인 1907년 7월 정봉 준 의진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봉준 의병장의 지휘 아래 충 주군 노은면(老隱面)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봉준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직후 의병을 일으킨 뒤, 1907년 8월부터 경북 문경(聞慶)・청풍(淸風), 충청도 괴산(傀山)・충주(忠州), 강원도 원주(原州), 경기도 여주 (驪州)・지평(砥平)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장이었다. 이후 그는 정봉준 의병장을 따라 강원도 원주(原州)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정낙인(鄭樂 성 명정시항한 자鄭時恒 이 명없음 성 별남 생년월일 (1866, 공훈록의 생년은 1867년;편자 주) 사망년월일미상 본 적충청북도 충주주 소忠北 忠州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1995 훈 격애국장 공적개요 1907. 7月(음) 鄭奉俊義陣에 가담하여 15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同年 8月 忠北 忠州에서 일본군과 交戰하였으며 鄭樂寅, 方仁觀(寬), 元容振 義陣과 合陣하여 500여 명으로 軍勢를 확장한 후 동년 12月 江原道 原 州 祥業山에서 日軍과 交戰하고 1908年 金學善義陣에 참여하여 軍需品 을 모금하는 등 활동하다가 被逮되어 流刑 15年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