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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공훈록> 임응서(林應西) (1881)~미상 강원도 화천(華川) 사람이다. 김춘수(金春洙)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강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늑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 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 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종교활동・교육활동・학술활동 등을 통 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 동은 1907년 7월「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해 산 직후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하자, 이를 계기로 시위대 병사들 이 봉기하여 남대문을 중심으로 서울 시가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반일 민족 의식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 같은 시기에 임응서는 대일 항전을 결심하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가던 중, 양주군 강릉천(江陵川) 부근에서 김춘수 의진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성원(李成元)・김성관(金成寬) 등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로부터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니 남아가 이런 때를 당 하여 어찌 안연하게 이를 볼 수 있으리오. 그대도 역시 참가하여 일본인들을 배척하고 나 라 일을 같이 하자"고 권유하자, 이로부터 김춘수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김춘수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들과 같이 경기도 양근(楊根)・포천(抱川)・가 평(加平)・지평(砥平) 등지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07년 10월 1일 여주(驪州) 천양(川陽)에서, 같은 달 22일에는 강원도 홍천(洪川)군 남창(南倉)에서 일 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8년 4월 3일 평리원 (平理院)에서 종신 유형(流刑)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429. 註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246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