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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이구재가 거느리고 온 80명, 강원도의 민긍호의 부하가 약 8백 명, 강화・청주의 해산병, 기타 경기 각지의 해산병, 기타의 훈련받은 구 군인이 양주 집합시 약 3천 명이나 되었 다. 이는 해산병과 그 이전의 군인이었던 자를 합한 숫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 의진의 개 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수부 13도총대장 : 이인영, ・경기, 황해, 진동의병대장 : 권중휘, ・군사장 : 허위, ・관서의병대장 : 방인관, ・관동의병대장 : 민긍호, ・관북의 병대장 : 정봉준, ・호서의병대장 : 이강년, ・호남 의병대장 : 문태수, ・교남의병대장 : 박정빈》 13도연합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이 11월부터 서울 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군과 싸워 퇴군하던 1908년 2월 초순(음력 1907년 12월말)까지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의 의진의 모습에 대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서로 연락하여 그 성원을 받아 각 도에 격문을 전하고 고기(鼓起)로써 하니 원근 응모 자가 주야부절로 모인 자가 만여 인이었다. 이에 있어서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 하고 협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하여...... 군사(軍師)는 그 군려(軍旅)를 정돈하 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 도 의려(義旅)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 하고, 몸소 3백 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 군이 이르지 않 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와 서로 분전하였으나 적에 대적할 수 없어 이에 퇴군하였다." 본래 연합부대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음력 정월을 기하여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즉 1908년 1월 28일(음력 12 월 25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이인영은 부음을 들고 곧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자신은 즉시로 문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군사장인 허위가 친히 3백의 정병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집합하기로 약속한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락이 끊어지게 되고, 이 기미를 알 게 된 일본군에게 각 처로부터 닥쳐오는 의병 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로써 연합 의진의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앙 양되어 가는 가운데 단행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1908년 2월(양력) 이후 서울 근교에서의 의병들의 활약 기사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인영의 하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후 부친의 장례를 마친 이인영에게 많은 의병들이 다시 거의를 권하였으 나, 그는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에 불충이 니, 효는 충이니 하는 것은 그 도가 하나요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국풍(國風)을 지켜 3년 종상(終喪)의 효도를 다한 후 재기하여 13도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 으로 일인을 소탕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유생의 입장에서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 다. 그 후 이인영은 노모와 슬하의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尙州郡)에 잠류(潛流)하였다 가 다시 충북 황간군(黃澗郡) 금계동(金溪洞)에 이거하여 살던 중 1909년 6월 7일 일군 헌병(憲兵)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 경성감옥에서 형을 받아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