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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편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孤獨)을 피하고 일 치단결하는 데 있은 즉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 편자 주)로 경기 땅을 쳐들어가면 온 천하는 모두 우리 것이 안 되는 것이 없고, 한국문 제 해결이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즉, 이인영은 이 격문에서 고리적인 의병항쟁을 지양하 고 대동단결의 힘으로 서울을 공략하여 의병들의 최후 목표를 달성하고자 호소하였던 것 이다. 한편 이인영은 이에 앞서 1907년 9월(음력) 원주에서 관동창의대장의 이름으로 미 국을 비롯한 각국의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초하여 발송하였으니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 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 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 조리 죽이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 - 광무 11년(1907년)9월 25일.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 영》 또한 김세영(金世榮)을 서울에 파견하여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발송하였으 니 그 격문의 개의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조난(遭難)을 설망하면서 의병은 순 수한 애국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여 정의・인도를 주장하 는 여러 나라의 동성응원(同聲應援)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격문은 각국으로 전달되어 항일의병투쟁의 합법성을 국제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인영의 격문(통문)에 따라 1907년 11월(음력) 각도 의병장들은 속속 양주(洋酒)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각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온 각도의 의병장들을 보면, 전라도는 문태수(文泰洙), 충청도는 이강년(李康秊), 강원도는 민긍호(閔肯鎬), 경상도는 신돌석(申乭石), 평안도는 방인관(方 仁寬), 함경도는 정봉준(鄭鳳俊), 경기도는 허위(許僞), 황해도는 권중희(權重熙)였다. 그런 데 이 가운데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통문을 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방인관(方仁寬, 평 안도)은 80명의 의병을, 정봉준(鄭鳳俊, 함경도)은 7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자발적으로 연 합전선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때 각 도의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 하였다.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받은 이인영은 각 도 의병장과 상의한 후 진명(陳名)을 내 리고 각군의 칭호를 정한 후 전국 연합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하였다. 황해도의 권중희는 그 후 13도창의대장 이인영의 휘하에 소속케 되어 황해도는 공장(空將)의 도가 되었으므 로 허위가 경기・황해도를 지배하고 박정빈(朴正斌)을 황해도의 아장(亞將)으로 삼았다. 확정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13도창의총대장 : 이인영, ・전라유진소 전라창의대장 : 문태수, ・호서유진소 호서창의대장(충청도) : 이강년, ・교남유진소 교남창의대장(경상도) : 신돌석, ・진동유진소 진동창의대장(경기도) : 허위(아장 박정빈), ・관동유진소 관동창 의대장(강원도) : 민긍호, ・관서유진소 관서창의대장(평안도) : 방인관, ・관북유진소 관 북창의대장(함경도) : 정봉준》 이렇게 구성된 13도연합의병 부대의 총수는 약 1만 명(혹은 8천 명)이었고 그 가운데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 무기, 즉 양총을 가진 과거의 진 위대 병사들 및 기타의 훈련받은 군인이 약 3천 명이 있었다. 즉, 문경으로부터 이은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