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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공훈록> 이인영(李麟榮) 1867. 4. 27~1909. 9. 20 이명: 인영(寅榮)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이며,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 학자로 많은 문인들이 추앙하여 마지않았다. 후에 문경(聞慶)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암 류인석(毅 庵 柳麟錫)・운강 이강년(雲崗 李康秊)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오백 명을 영 솔하여 춘천(春川)과 양구(陽口) 사이에서 일군 80명과 격전하여 적 다수를 도륙하였으며, 이때 아군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96년 여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광무황제의 선유문을 받아 의진을 해산하고 문경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해산군들이 각지 의 의병에 합세하여 의병운동의 양상이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등 의병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原州)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이 구재(李九載)가 해산병 80명이 포함된 5백 명의 의병을 소모한 후 이인영을 찾아와 의병 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나도 창의(倡義)의 뜻을 품은 지는 오래되 나 부(父)가 병상에 누워 있어 기거를 사람에 의지해야 할 형편이므로 차마 가정을 떠나 지 못할 정리라." 이에 이은찬은 "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난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 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사사로써 공사를 미루리오." 하면서 4일간 그곳에 머물 면서 간곡하게 유하였다. 이인영은 드디어 이를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 창의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소모하였다. 격문에 자자구구마다 비분 강개에 차 원근으로부터의 응모자가 날로 불어났다. 이때 소모의 방법은 사람을 시켜 마 을마다 격문을 보내어 일반에게 알리고 응모자를 비밀리에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 이었다. 소모에 응한 의병이 수천 명(그중에 해산병 2백 명)에 달하자 우선 급한 것은 식 량과 자금 문제였다. 일부 무고한 양민의 미곡을 탈취하여 의병운동 자금으로 유용하고자 하는 무리도 있었으나, 이인영은 "가련한 창생에게 참해(慘害)를 주어 기한(飢寒)에 떨게 하는 것은 차마 우리들이 할 바가 아니오. 또 의병이 할 행위가 아니니, 우리는 오직 천 의(天意)를 대신하여 그들 매국노 5간7적(五奸七賊) 및 신협약을 체결하는 데 부화뇌동한 현 내각원(內閣員)등의 불의의 재보를 빼앗아 군자(軍資)를 도울 뿐이라." 하여 매국노들 의 재산을 빼앗아 의병활동에 충당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인영이 관동창의대장에 오르자 그의 공평한 인품을 흠모하여 원근에서 그를 따르는 의 사가 계속 모여들어 군세는 더욱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 (橫城)・지평(砥平)・춘천을 왕래하며 8도의 의병규합에 진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발하여 1907년 11월에 각도의 의병 부대를 양주로 집결 하도록 하였다. 원주를 버리고 양주를 8도 의병의 집결처로 한 것은 원주 땅은 교통이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