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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백천(白川)・연안(延安)을 연하는 선내 및 해상 도서 유격전으로 일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타격을 주었다. 이은찬은 그들의 총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그는 애국심을 고취시 키는 등 지방민에게 환심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군량(軍糧)・군자금(軍資金)을 마련 할 때에는 직접 세궁민(細窮民)들로부터 거두지 않고 각 면장・동장에게 통고하여 거두도 록 하고, 구입품에 대한 대금 지불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이행하였다. 또 필요한 때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물자를 받고 후에 반드시 화폐로 바꾸어 주었다. 따라서 지방민들 은 의병을 믿었을 뿐 아니라, 의병을 위하여 보초도 서 주고 관헌의 동정을 살펴서 알려 주는 등 그들의 활동을 지지, 옹호하게 되었다. 1909년 1월 온정원(溫井院) 부근의 의병 에 대한 일군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1월 17일 해주 수비대의 장졸 18명이 토벌대로 파견 되자, 미리 연안(延安)・청단(靑丹)역 사이로 빠져 남방연안 도서로 이동한 이은찬 의진은 1월 19일 야음을 타 2척의 배에 분승하여 연평도(延坪島)의 일군 파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후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이때 이근수(李根守)등 46명이 순국하였다. 2월 27일 이은찬은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容大) 등 약 3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양주군 석우리(石隅里) 북방 고지에서 양주와 축산리(畜産里)의 일군 헌병 연합 부대와 대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주었으나 또한 의병 부대에도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그 후 이은찬은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 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울의 박노천(朴魯天)・신좌균(申左 均) 등이 이러한 이은찬의 계획을 탐지하고, 조수연(趙壽淵)을 보내어 유인해 내도록 하였 다. "간도로 들어가서 군사를 훈련시키려면 군자금과 군량 등 그 비용이 적지 않게 필요 할 것이요. 그 비용은 얼마가 들든 내가 부담할 터이니 서울로 잠입해 들어와 의논합시 다." 사실 의병활동에는 비용이 적지 아니 들었으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은찬은, " 대장(이인영)이 여주에서 패전하고 지금 황간(黃澗)에 은신하고 계시니 가서 뵙고 의논 하는 것이 도리이다." 하였으나, 조수연은 한번 놓치면 안 되겠으므로 "박노천과 신좌균을 용산역에서 만나보는 것이 매우 좋을 듯하다."고 강권하므로 3월 31일 용산역으로 갔다. 그것은 적의 함정이었으므로 곧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분노한 강기동(姜基東)・남 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永)・임명달(任明達) 등이 격문을 띄워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은찬은 심문하던 검사가 거병한 이유를 묻자 대략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라를 빼 앗겼으므로 보복하고자 거병하였으니 모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예전에 청나라를 섬겼으니 오늘날 일본을 섬기기로 안 될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그러나 청나 라는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적이 없지만 너희는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지 않았느냐?” 재판정에서도 그는 늠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너희와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나의 거의는 홀로 한국만 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지신의 영욕(榮辱)을 생 각하랴.”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창생을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