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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활동은 그러한 지역적인 영향 하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들은 일부 해산병을 중심으로 의병 500명을 소모(召募)한 후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갔다. 이인영은 을미사변 후 류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문경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인영을 찾아가 나흘 동안 간곡히 기병할 것을 권유하고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이인영은 원 주로 출진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르게 되었다. 곧 비분에 찬 격문(檄文)을 사방에 띄워 많은 호응을 받고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의 진용과 편성명단은 다음 과 같다. 《관동창의대장-이인영(李麟榮), 총독장-이구채(李球采), 중군장-이은찬(李殷瓚), 좌군장-방인관(方仁寬), 우군장-권중희(權重熙), 유격장-김해진(金海鎭), 좌선봉장-정봉준 (鄭鳳俊), 우선봉장-김병화(金炳和), 후군장-채상준(蔡相俊), 운량관-현이보(玄履甫), 재무 관-신창선(申昌先)・민춘원(閔春元), 좌총독장-김현복(金顯福), 우총독장-이귀성(李貴成)》. 이즈음 연천(連川)에서 봉기한 허위(許蔿)의 의병이 당도하여 관동창의군 편제를 발전시켜 13도창의군으로 개편하여 전국 의병 진영에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내어 서울 진격을 제 의하였다. "용병의 요결은 고독을 피하고 일치 단결하는데 있은즉, 각 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提之勢)를 이루어 경기로 들어가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되어 한국 문제 해결 에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진용이 편성되었다. 《13도창의대장-이 인영(李麟榮), 황해진동의병대장-권중희(權重熙), 군사장-허위(許蔿), 관서의병대장-방인관 (方仁貫), 관동의병대장-민긍호(閔肯鎬), 관북의병대장-정봉준(鄭鳳俊), 교남의병대장-박정 빈(朴正斌)(처음에는 신돌석이었다.), 호서의병대장-이강년(李康秊), 호남의병대장-문태수 (文泰洙)》. 그러나 정미의병이 대중적 의병운동으로 크게 도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 돌석(申乭石)・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의 부대 등 서민의병의 진영이 참여하지 못 하였다. 특히 신돌석의 경우 연합 의진에 참여하였던 것을 그의 신분이 천민에 가까웁다 하여 박정빈(朴正斌)으로 바꾼 것이 의병활동의 한계성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 계성 때문에 이강년과 민긍호의 부대가 서울 진격전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 인다. 더구나 연합 의진의 대장인 이인영이 부친 사망을 이유로 하여 가장 주요한 시기에 물러나고 허위가 대장이 되어 진격을 감행하였지만 이미 기밀이 누설되어 동대문밖 격전 에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허위는 1908년 2월까지 서울 근교에서 유격활동을 전 개하였다. 이은찬은 자신의 의진을 거느리고 포천・양근(楊根)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위와 손을 잡고 유기적 전략을 전개하는 등 크게 위세를 떨치었으며 때로는 농민출신 의병장 김수민 의진과도 협력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말경 경기 의진의 주요 의병장이 처형되자 이 지역의 항일운동은 보다 격화되었다. 1909년 임진강 유역은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어서 적게는 수십 명, 많은 것은 200명 내외의 의병집단이 운집하였다. 이들은 양주・포천・연천(連川)・삭녕(朔寧)・금천(金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