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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물건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和順함이 안에 쌓여 英華가 밖에 드러났다. 그 溫厚卑謙한 뜻과 至誠愛好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고 말씀에 나타나 일찍이 모나거나 차별하는 것 이 있지 않았다. 정성으로 道를 강론하고 부지런히 鄕飮禮를 행함에 있어서는 長潭 雲潭 朝宗巖 大老祠 에 두루 다녀왔으며, 벗들과 從遊하는 곳에는 1년에 서너 번이거나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 위로는 父師의 뜻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後進들의 기대가 되어 힘쓰고 힘써 게을리 하지 않아 연세가 높아져서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山水를 사랑하여 노래하고 읊조리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精舍 남쪽에 작은 연못을 파고 또 그 서쪽에 反招臺를 쌓아 봄바람이 화창할 때와 가을달이 밝을 때 큰 갓과 넓은 띠 로 흰머리에 청여장을 짚고 그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어떤 때는 술자리를 열고 어떤 때는 시를 짓기도 하였는 바 훌쩍 세상 시름을 벗어난 기상이 있고 편안히 천명을 즐기는 뜻 이 있었다. 著書에는 錦溪集 九冊이 있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學問 全?와 春秋大用을 우리나라 선배 중에 오직 尤翁만이 당할 수 있는데 다만 大全 의 卷數가 매우 많아 독자들이 쉽게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고 하고, 그 절실하고 요긴한 내용을 뽑아 분류하여 十數篇을 만들고 宋子書節略이라 이름하였다. 戊午年 2월 8일 丙寅日에 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날 저녁에 氣貌가 평소 같고 글 읽는 소리도 평상시 같았다. 이때 從姪 時學이 모시고 앉았었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람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直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 곧지 않으면 마음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없다.”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문안하였더니 눈을 감고 말씀이 없었는데 申時에 이르 러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喪禮를 집행함에는 四禮便覽에 의거하여 했으며 士林葬을 행 하였다. 묘소는 深谷의 先塋 오른쪽 등성이 艮坐原이다. 아! 先生의 盛德과 宏學은 본디 세상이 큰 쓰임이 있을 만한 것이었으나 다만 좋지 못 한 시기를 만나 초야에서 자취를 감추고 華西 重菴 省齋 三先生의 遺緖를 結梢하였으 니, 이것이 이른바 扶持하지 않음으로써 扶持하는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90년이 되었다. 국내 유림들이 선생의 도학과 의리를 사모 하여 묘소 길가에 추모비를 세워 기리고자 하여 추모비건립원회를 결성하였다. 나는 선생의 연원으로 늘 泰山北斗처럼 사모하고 있으니, 지금 이 일에 굳이 사양만 할 수 없어 삼가 그 行狀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쓰고 이어 銘하니, 銘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