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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다. 庚戌年 가을 국가에 큰 변고가 있었다. 恩賜金이라 칭탁하여 나라 안 연로한 이들에게 돈을 골고루 보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가 71세였다. 선생이 엄한 말로 물리쳐 말씀하 기를, “李根元은 조선의 가난한 선비로 스스로 天地間 逸民이라 칭하고 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道가 있는 스승을 뵈어 尊華攘夷의 의리와 克己復禮의 학설을 강론하였으나, 힘써 행하지 못하고 아는 것 없이 늙기만 하였다. 지금 일본이 남의 임금을 폐지하고 남의 나라를 삼키고서 그 돈을 그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있으니 그 백성된 자가 편히 받으려 해야 하겠는가! 내 나라의 임금이 하사하는 것 이 있어도 의리에 옳지 않고 마음에 편치 않은 바가 있으며 억지로 받을 수 없는 것인 데 하물며 이를 벗어나 절대로 받을 만한 의리가 없는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 이것이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받지 않는 이유이다.” 하였다. 뒤이어 위협과 협박을 당하고 두 차례 지평 감옥에 구금되었으니,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던 날은 모두 7일이었다. 누차 곤욕을 겪어 자못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하 였는데, 늠름히 犯接할 수 없는 節義가 있었다. 이때 다음과 같은 箴을 지었다. “일본이 주는 금은 결코 받을 수 없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리는 우주에 영원하 네. 한 개도 취하지 않으니 마음이 金石처럼 단단하네, 이렇게 하는 것은 秉彛好德의 마 음일 뿐이네” 아! 선생은 斯道가 매우 쇠하는 때를 당하여 곤액에 빠져 生死를 넘나들면서도 굳은 지 조가 끝까지 변치 않았으니, 그 융성한 덕망과 빛나는 광채가 족히 陽德을 기르고 道?을 연장할 만하여 우뚝이 당세의 스승이 되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매일 동틀녘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하고 의관을 갖춘 다음 家廟에 절하고 五賢影堂에 다녀왔는데, 精舍 동쪽에 一直堂을 건립하여 朱子를 봉안하고 尤菴 ㆍ華西ㆍ重菴ㆍ省齋를 配享하여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물러나와서는 집안 사람들을 인솔하여 家禮와 小學 몇 조목을 읽게 한 다음 揖禮를 행 하고 書室로 나가 諸生들과 講論하였는데 날마다 한결같았다. 선생의 제자들이 수백 명이었는데 道學과 節義를 다반사로 삼아 김상태 김태원 안승우 이규현 장익환 등은 擧義함으로써 斯道를 부지하고 박준빈 배진환 천낙귀 최형근 추성 구 등은 講學함으로써 斯道를 부지하여 당시의 元氣가 선생 문하에 집합하여 있었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적에 뜻을 받드는 효도와 봉양하는 정성에 모두 그 자식된 직분을 제대로 하였으며 戊寅年에 老稼堂의 喪을 당하고 壬午年에 어머니 李氏의 喪을 당해서 는 예절과 슬픔이 모두 극진하였다. 婣戚과 친목하고 孤幼를 撫恤하여 자손에게는 의로써 가르치고 부인에게는 예로써 거 느렸으며, 일상생활의 집기들은 한결같이 검소하고 소박한 것으로 하고 서양이나 왜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