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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33인 중 한 사람인 정암(正菴) 이종훈(李鍾勳) 선생의 장자(長子)로서 일찍이 큰 뜻을 품 고 일본으로 건너가 선배인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씨와 더불어 국사(國事)를 논의(論議)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나머지 급히 귀국하여 매 국노(賣國奴) 이완용(李完用)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일본관헌(日本官憲)이 선생을 체포하려 하자 양평(楊平)으로 피신(避身), 동년(同年) 11 월에 다시 산재한 동지를 규합하고 몸소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어 용문산(龍門山)을 근거지(根據地)로 무장투쟁(武裝鬪爭)을 거듭하던 중 동월(同月) 30일 용문산중(龍門山 中)에서 일병(日兵)과 교전 끝에 적탄에 맞아 용문산(龍門山) 기슭에서 적설(積雪)위에 붉은 피를 뿌리고 25세를 일기로 전사(戰死)하였다. 아들 태운은 언론계에서 40여 년간을 몸담으면서 부조(父祖)의 애국심을 이어받아 꾸준 히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헌신하였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은 애국애족의 표본으로서 우리 겨레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12월 13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191). 이구채 1. 약전(略傳) 성 명 (異名) 활동 시기 출 신 거주지 생,몰 참고문헌 및 전 거 활동내용 등 서훈및 포 상 * 이구채 李球采 (九載) (球蔡) 을미 ~ 정미 횡성 1869. 3. 29 ~ 1909. 1. 18 〔공훈록, 양 평의병운동사 p.129, 경기 도항일독립운 동사 p.71. 95, 여주군사 p.72·501, 이천독립운 동사 p.197, 의병전쟁과 서대문형무 소 p.40.〕 1896년 창의한 이인영(李 麟榮)의 종사(從事)로 제천 의진에 합류, 1907년 의병 장 이인영이 지휘하는 관 동창의진(關東倡義陣) 총독 장(摠督將), 1907년 지평 등지에서 활동하고 서울진 공작전 참여 애족장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