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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 1908년 이은찬(李殷瓚)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고 6월에 강기동은 남학서(南 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과 함께 격문을 띄우고 병사를 모아 대일투쟁 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맹서하였다. 10월 22일 포천으로 들어가서 1910년 2월 포천에서 왜병과 접전하였다. 이 시기에 강기동 의진의 좌군인 전성서(田聖瑞) 휘하 의 한인수(韓仁秀)와 김순복(金順福)은 포천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 죄선고를 받았다. 3월 6일 강기동은 이용규 등과 더불어 영평(永平)으로 들어가 활약 하니 일인들은 현상금을 천금으로 올렸다. 4월 29일 강기동은 전성서와 함께 양주(楊 州)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16일에는 양주 노원(楊州 盧原)에서 교전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순사를 넘어뜨리고 피신할 수 있었다. 이즈음 강기동은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병력 1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강원 도 일대를 넘나들었다. 1910년 8월 29일 소위 한일합방 후 일제는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쳐 임시 파견대 1개 대대와 헌병・경찰대의 연합 병력으로 경상도 일 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安東)・예천(醴泉)・영춘(永春)・봉화(奉化) 일대 에 대한 포위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10 년 9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이르는 40일 간에 걸쳐 황해도내 1개 여단(旅團) 병력 을 집중하여 대살육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의병부대에 대한 작전으로 아울러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 계몽운동가들의 거점을 소탕하였다. 일이 이렇게 급진전되어 가자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북간 도로 이동하였다. 이즈음 강기동은 계속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그 후 북간도로 이동해 가던 중 1911년 2월 원산(元山)에서 체포・압송되어 서울 용산(龍山)에서 총 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437~438. 註ㆍ梅泉野錄 498・513・524・526・531・533・535面 ㆍ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289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566・685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5卷 151・155・662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1卷 83・142・144・148・152・161・ 172・175・540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1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8・37・55・57・49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