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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300여 명과 3일간 교전하였다. 또한 충북 충주군 목계(木溪)에서도 일본군 10여 명과 교 전하여 그 중 2명을 사살하고, 말 5필 및 병기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날 밤 청룡리에서 유숙하다가 일본군 4~500여 명의 습격을 받고 다리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여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6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 유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3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112~113. 註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輯 第1輯 237面 3. 판결문 등 판결문 요약 판결문 성명 우상옥(禹相玉) 위 피고 우상옥의 내란범 안건을 검사 공소에 의하여 심리한 즉, 피고가 작년 폭도들이 봉기할 때에 매일 국사(國事)를 생각하며 항상 분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는데, 작년 음력 8월 15일 폭도 우두머리 정봉준(鄭奉俊)이 부하 700여 명을 거느리고 피고가 거주하는 마을에 오자 그의 무리에 가입하여 따라다니면서 괴산(槐山) 칠성암(七星岩)에서 일본병 8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일본 병사와 말이 약간의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또 지평(砥平) 삼산동(三山洞)에서 일본병 300여 명과 3일 동안 교전하다가 마침 눈비를 만나 바로 퇴 각하였는데 피차의 살상자의 수를 알 수 없다. 또 충주(忠州) 목계(木溪)에서 일본병 10여 명과 교전하여 말 5필, 병기 및 개를 빼앗고 일본인 2명을 살상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청룡리(靑龍里)에 가서 유숙하다가 일본병 400~500명이 갑자기 내습하여 그의 무리가 많이 피살되었고, 피고 또한 왼쪽 다리에 총 이름/별명우상옥(禹相玉) 당시나이32세 본적/주소충청북도 충주군판결기관 평리원 죄 명내란 생산년도1907 주 문유(流) 15년(원판결 폐기함) 판결날짜1908.07.29 사건개요 폭도 수괴 정봉준의 부하가 되어 무리 700여 명과 함께 일군과 여러 차례 교전 타격을 주고 병기를 노획한 사실이 있고, 삼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