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page

189 참령(參領)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은 5월 26일을 기해 마침내 제천성 공략에 나서 대 규모 공세를 취하였다. 황석촌(黃石村)을 장악한 뒤 대덕산(大德山)을 통해 북창(北滄) 나루를 건너 제천으로 들어온 경군은 남산에 인접한 고장림(古場林)까지 진격하며 의진 을 압박하였다. 이에 선생은 고장림에 맞닿아 있는 남산에 진을 치고 본진을 지휘하며 관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선생은 최일선에서 직접 화약을 넣어 포 군들에게 나눠주며 전투를 독려하였고 한때 세 차례나 경군을 고장림 밖으로 몰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후 들어 비가 내리자 전황이 급격히 불리해졌다. 의병들은 우천으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의진은 와해되고 제천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선생은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중 오른쪽 다리에 탄환을 맞았다. 부상을 입은 채 경 군의 대장소에 끌려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개한 어조로 우국충정의 소신을 당 당히 밝히며 장기렴의 불의를 성토하였다. 나는 본래 나라의 원수를 갚고 인류의 명맥을 붙들려고 대의로 일어났다. 불행히 잡혔 으니 당당히 죽을 것이거늘 어찌 역적의 무리에 붙겠는가. 의(義)로운 싸움은 비록 지더 라도 이기는 것이요 죽더라도 영광스러운 것이며, 적(賊)의 싸움은 비록 이기더라도 또한 지는 것이요 살더라도 죽는 것이다. 생사를 초탈하여 선생이 보여준 강경한 의열과 불꽃 같은 투지가 잘 드러나 있는 것 이다. 이에 선생은 경군들에 의해 타살되어 3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또 선생이 피체 될 때 선생의 문인으로 중군의 종사로 있던 19세의 청년 장수 홍사구(洪思九)도 스승을 지키다가 함께 장렬히 순국하여 그 성명을 후세에 길이 전하였다. 방치되어 있던 선생의 시신은 순국 다음날 수습되었다. 전란의 와중에 미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형편에서 동지 박정수는 이튿날 제천읍 남쪽의 갈마곡(渴馬谷)에 들어가 양지바른 언덕에 버려진 여러 시체 가운데서 선생의 시신을 찾아내어 역시 동지인 이용 규(李容奎)와 함께 경황 중에 제천 화산(華山)에 임시 매장하였다. 뒷날 선생의 묘는 고 향인 양평군 양동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이 의진의 군무를 총괄하면서 전력 증강은 물론 군사들의 기율과 사기 진작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선생의 순국 직후에 의진이 즉시 서북 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곤궁해진 상황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한 동문의 동지인 박정수(朴貞洙)가 “공이 순절한 후로 의병의 세력이 크게 꺾여서 가는 곳마다 달아나고 패하였다.”라고 언급한 대목도 진중에서 선생이 차지하고 있던 크나큰 비중을 대변해 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