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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소위 토왜(土倭)들을 참수하여 단죄함으로써 개화정책을 지지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 려 그 각성을 촉구하였다. 당시 호서의 중앙인 충주에는 관군 4백 명을 비롯해 일본군이 다수 집결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 은 물론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반을 확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월 16일 제천의병이 충주성을 공략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5. 제천의병의 중군장 이 무렵 원주 방면으로부터 승지 우기정(禹冀鼎)과 이호승(李鎬承)이 각각 민병 3천 명과 5백 명을 원조해 와 제천의병의 외형적 기세는 실로 대단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총을 가진 자는 4백 명에 불과해 실질적인 전력 면에 서는 충주성 안의 관군에 비해 크게 열세에 놓여 있 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점령할 수 있 었다. 충주성 점령은 제천의병이 거둔 전과 중에서 가 장 큰 것이었다. 충주성을 점령한 의병은 먼저 충주관찰사 김규식 (金奎軾)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서상렬․ 원용정․ 홍선 표 등을 영남지방에, 이범직을 호서지방으로 각각 소 모사(召募使)로 파견하여 각지의 민병을 모아 그 활동 영역을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영남지방에는 안동 의 김도화(金道和), 예안의 이중린(李重麟), 예천의 박 주상(朴周庠), 순흥의 강익(姜釴), 풍기의 김교명(金敎明), 영천의 정규섭(丁奎燮), 봉화의 금석조(琴錫祚) 등 7개 고을 의진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남으로 내려간 서상 렬은 이들 의진을 연합, 그 맹주가 되어 상주 태봉(台峰)에 있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 였다. 또, 호서로 파견된 이범직도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는 등 그 기세를 떨쳤다. 하지만 충주성을 장악한 의병은 점차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 동안 관군과 일본군 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급로를 차단당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에 의진은 부득이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달천(達川)을 거쳐 청풍을 지나 제천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동안 수안보 전투에서는 중군장 이춘영을, 충주 방어전투에서는 주용규를 잃어 전력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선생은 제천으로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