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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이때 제천에 주둔해 있던 선생은 제천군수 정영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천(酒泉) 으로 진을 옮겼다. 원주에서 일어나 영동지방으로 이동 중이던 민용호(閔龍鎬) 의병과 합진하여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평창으로 올라간 선생은 방림․진부까지 뒤따 라갔으나 민용호는 합진을 거부한 채 대관령을 넘어 구 산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류인석으로부터 회 군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를 이끌고 영월로 내려와 의병 본진에 합류하였다. 이때 류인석은 선생 외에도 이 정규(李正奎)를 영남으로 보내 서상렬과 이춘영도 영월에 모이게 함으로써 본진의 전열을 가다듬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선생을 비롯하여 영월에 모인 이필희․ 서상렬․ 이춘영 등은 화서문파의 종장으로 의병에 투신한 이들의 정신적 구심체였던 류인석을 의병대장에 추대하였다. 이 에 양모(養母) 덕수이씨의 상중에 있던 류인석은 상복을 벗고 항일전선에 나서 항일수구를 의미하는 ‘복수보형(復 讐保形)’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1896년 2월 8일의 일이다. 이로써 류인석을 정점으로 한 제천의병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어 의진의 편제도 일신하였다. 새롭게 정비된 편제에서 선생 은 전군장을 맡았으며, 그밖에 이춘영은 중군장, 신지수는 후군장에 임명되었고, 선봉장 에는 여전히 김백선이 포진해 있었다. 당시 제천의병은 선생을 비롯하여 이춘영 등 이 모집한 지평 민병 4백 명과 김백선이 이끈 지평 포군 수백 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밖에 이문흠이 이끈 단양 포수 등 인근 각지의 민병 들로 조직되었다. 이와 같이 제천의병은 의병장 류인석을 정점으로 하여 주로 화서학파 연원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 단위의 소규모 의병 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 직 면에서는 연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영월에서 제천으로 회군한 의진은 즉시 충주 를 공략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 제천의병은 단양군수 권숙 외에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