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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장담에 있던 선생은 부친으로부터 거의를 위해 안창으로 오 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선생은 이범직(李範稷)․ 원철상(元澈常)․ 신지수(申芝秀) 등 동 지들을 안창에 모이도록 통지하고, 자신도 급거 안창으로 올라와 거의에 합세하였다. 안 창에 모인 의병은 1896년 1월 12일(음 1895년 11월 28일) 드디어 거의를 선포하였다. 의진은 곧바로 원주로 내려와 군청을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자, 군수 이병화는 황급히 도망갔다. 이어 남하를 계속한 의진은 제천을 점령하였다. 제천 군수 김익진도 도망하였기 때문에 무난히 입성 할 수 있었다. 4. 제천의병의 산파 의진이 제천에 입성하자 선생과 함께 동문수 학한 많은 인사들이 합류함으로써 의진의 규모 는 커져갔다. 이에 따라 편제를 갖추어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이필희(李弼熙)를 의병장으로 삼 고, 서상렬(徐相烈)을 군사(軍師), 이춘영(李春永) 을 중군장, 김백선을 선봉장에 각기 선임하였다. 이때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 (軍務都有司) 직책을 맡았다. 거의 초기에 이필희는 의병전쟁 시기에 발포된 여러 격문 가운데 백미로 평가되는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하였다. 이 격문은 얼마 뒤에 류인석이 의병대장에 등단한 후 전국적으로 포고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제천에서 전열을 정비한 의진은 곧 단양으로 행군하여 군수 권숙(權潚)을 붙잡아 처 단하였다. 하지만 단양까지 함께 행군했던 선생은 곧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제천으로 돌 아왔다. 의병의 근거지인 제천을 지키고 그 일대에서 군사를 추가로 모집하기 위해서였 다. 한편, 이필희가 이끈 의병 본진은 1월 22일, 지금은 충주호 나루터로 변한 단양 장 회협(長匯峽)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 1개 중대를 맞아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 다. 그러나 이후 계속되는 공세를 피하여 우선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