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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2. 화서학파의 성원 어려서 집안에서 가학을 공부해 오던 선생은 15세부터 인근에 있던 이용강(李龍崗)의 서숙을 출입하며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선생이 처음 스승으로 섬긴 이용강은 잘 알려 져 있지 않은 인물로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춘 큰 학자라기보다는 대체로 학동을 가르 치는 것을 업으로 삼던 향촌의 평범한 선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시절 선생이 한 공부는 주변 분위기로 미루어 주로 역사와 문학, 그리고 사서(四書) 등 기초적인 경학이 었을 것이다. 선생은 한때 과거시험을 위한 과문(科文)을 공부하기도 하여 벼슬길에 뜻을 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네가 아버지를 섬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임금을 섬길 줄 알겠느냐!”라는 훈계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출세를 단념하고 도학 공부에 전 심하였다. 이에 선생은 지평의 이름난 학자인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의 문하에 들어 가 수학하였다. 이근원은 조선말 3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하에서 수학한 정통 도학자로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의병장과 동문수학하여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이근원을 사사한 데 이어 선생은 21세 되던 1885년부터는 역시 이항로의 적통을 이 어받은 대학자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 1832~18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의 전수 과정에서 선생은 특히 류중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친 안 종응의 명으로 류중교를 찾아뵙고 나서 “위정척사와 화이인수(華夷人獸)의 구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멍하여 살 길을 구한 것 같고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라고 소회를 밝힌 점에서도 그러한 정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10여 년 간 선생의 행적은 자료상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기간에 는 류중교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심하였던 것 같다. 이 기간에 드러나는 단편적 기록에 의거해 선생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1889년에는 화서학파에서 성지처럼 여기던 가평의 대보단(大報壇)을 찾아 제향에 참례하였고, 제천으로 내려온 류중교가 1893년 작고한 뒤 에는 선사(先師)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백방으로 주선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즈음 정 화용(鄭華鎔), 홍사구(洪思九) 등 문인사우들과 함께 제천 봉양의 백련사(白蓮寺)에서 공 부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사찰이 안승우의 학문 연마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 다. 3. 지평의 의병 선도 선생이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1876년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킨 이래 일제는 침략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갔 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감추고 있던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