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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이 제천의 본진에 있는데 적군이 창졸지간에 쳐들어왔다. 대적하고자 할 때 남쪽에서 소 모활동이 활발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군이 모두 흩어졌다. 안승우는 모산(毛山)에 사는 판서 심상훈(沈相勳)을 찾아가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주천(酒泉)에 이르 러 모병하니 백여 명의 군사를 얻었다. 1895년 12월 영월로 들어간 안승우는 류인석에 게 의진의 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여 대장소(大將所)의 일을 주재하고 의진의 구성을 재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선봉장-김백선, 좌군장-원규상, 중군장-이춘영, 전군장-안승우, 후군장-신지수〉 1896년 2월 15일 충주로 진격할 것을 결의하고 이튿날 행군하여 17일 일거에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할 수 있었다. 입성한 이튿날부터 적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2월 23일 적 수백 명이 달천(撻川)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접하자 이춘영이 나아갔다. 이들은 조령 및 수안보에서 접전하였는데 교전 중에 이춘영이 전사하였다. 이춘영의 시신을 본집으로 보 내고 이춘영의 뒤를 이어 중군장으로 임명된 안승우는 남산을 파수하였다. 29일 적의 병 력이 증가하여 남산을 파수할 수 없게 되어 철군하니 적군은 충주성 바로 아래까지 육박 해 들어왔다. 이에 입안 주용규(朱庸奎)가 나아가 접전 중에 다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의 진은 분전하여 적을 멀리 쫓을 수 있었다. 3월 2일 적의 공격이 재차 감행되자 철군할 것을 결의하고 5일 달천을 거쳐 청풍(淸風) 으로 들어갔으며 8일에 제천에 이를 수 있었다. 16일 가흥(佳興) 방면으로 총 공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백선을 중심으로 하여 후군과 좌・우군이 합세하기로 작전을 구상하 였다. 그런데 김백선은 전세를 보고서 증원군을 요청하고 군대를 머물렀다. 본진에 있던 중군장 안승우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요는 사기를 보아 결정하여야 할 일이요, 군사가 적음을 말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심지지(中心之地)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보 낸다는 것은 그릇된 계산이 아니겠느냐." 하며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김백선 의 진의 역부족과 지휘부에 대한 불만, 그리고 각 의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에 가흥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회군하여 돌아온 김백선은 칼을 빼어들고 안승 우에게 대들었다. 결국 김백선은 군법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일은 의진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제천 본진에서는 후방 대책으로서 단양・청풍・원주・영월・평창・정선・지평 등 지에 수성장을 임명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관리하고 군사의 소모와 군수물자를 담 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동요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무마 격려하고 대열을 정 비하여 군사들의 민폐를 방지하여 군민 협력을 강화하는 데에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중 에서도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군사들에게 "국모의 형체가 재가 되고 말았는데 저승의 혼 백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군부(君父)께서 형상을 변하여 오랑캐의 모습을 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