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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을 격전하였다. 그 후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많은 소 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하였다. 이들 소의병부대는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 을 주면서 활약하였다. 이 같은 민긍호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 약한 의병부대로는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 (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 秊)・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 등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8월 5일의 민긍호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 사령부는 경성 주재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기관총 4정, 공병 1개 소대로 편성된 군대를 파 견하였다. 이들은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 다. 이들은 중앙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올렸다. ‘지형을 잘 아는 토민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 첩보 근무는 대단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정탐하여 은현출몰(隱現出沒) 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의 소탕에 노력하였으나, 수일간 조금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때 지방민들이 의병들과 협력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 다. 8월 12일 약 2백 명으로 편성된 민긍호의 부대는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 분견소를 포 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 이 의병부대로 지원해 왔으므로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수천 명이 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이천・양근 일대에서 의병들은 크나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 다. 일군 사령부는 당황하여 대전・수원 주둔의 일군(日軍)을 이천・장호원・여주 방면으 로 증강하고, 서울 주둔 일군을 양근・이천 방면으로 증파하였다. 8월 중순 민긍호는 이강년과 같이 충주 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운 후 22일 행동을 개시하 였다. 민긍호 의병 부대는 우측으로 공격하고, 이강년 부대는 좌측으로 공격하기로 하였 다. 그리고 강릉 방면으로부터 약 2백 명의 의병부대가 응원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이강년 부대에 앞서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 었으나,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 洞)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9월 7일 약 600명의 민긍호 의병 부대는 2개 부대로 나뉘어 홍천(洪川)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9월 10일 약 이백 명의 의병이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 나머지 사백 명의 의병은 낭천군아(狼川軍衙)를 기습 공격한 후 그곳 무기고에서 총기, 탄약을 접수하였다. 또 20일에는 춘천 남방으로 10리 되는 정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