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page

130 <공훈록> 류중악(柳重岳) 號 : 桓窩 류중악은 강원도 춘성(春成) 출신이다. 1868년부터 1875년까지 화서(華西)・중암(重庵)・성재(省齋)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공부 한 거유이다. 일찍이 이근원(李根元)・류인석(柳麟錫)과 함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하였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왜병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지평 용문산(砥平 龍門山) 아래에서 류봉석(柳鳳錫)·이소응(李昭應) 등과 같이 회동하여 거의할 것을 결의하였다.(전 거:양평의병운동사 p.244;편자 주)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근원・유인석 등 50여 명이 척양(斥洋)하는 상소를 올렸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됨을 통탄히 여겨 고향 가정리(柯亭里) 주산(周山)에서 통곡 문(痛哭文)를 지어 발표하였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왜병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지평 용문산(砥平 龍門山) 아래에서 유중악은 유홍석(柳弘錫)・이근원(李根元)・이소응(李昭應) 등과 같이 회동하여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류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1월 류중악은 이소응과 함께 춘천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소모하여 의암(衣岩)・ 진부산(陣缶山)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먼저 유사 조인승(曺寅承)을 잡아 주살하고 춘천 창의포고문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군자 금 3백 냥씩을 추렴하고 각지의 의병들과 연락하여 연합전선을 구상하였으나 2월에 이춘 영(李春永)이 전사한 후 각기 흩어져 산진(散陣)하였다. 1907년 7월 춘성군 가정리 여의내골(餘義川谷) 주산에서 류홍석과 함께 의병 6백 여명 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군자금이 없고 탄환이 부족하자 류중악은 자진하여 농우(農牛) 한 필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고 의연금을 모아 탄약제조를 지원하였다. 그 후 가평 주길리(珠吉里)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78~779. 註ㆍ桓窩集前編 ㆍ江原大學校 博物館 소장 軍資金計劃中名單 ㆍ獨立運動史 資料集 (國家報勳處) 2卷 16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