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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그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하여 한국군이 1907년 8월 1일을 기하여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할 결의를 하였다. 1907년 의병장 왕회종(王會鍾)의 부장으로 500여 명을 지휘하여 평강(平 康)ㆍ신계(新溪)를 점령하였고 각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금성(金城)ㆍ괴산(槐山) 등지 에서는 더욱 훌륭한 전과를 올렸다. 경기도 삭령(朔寧) 일대에 집결하여 진을 치고 있을 때 정미경기연합의진(丁未京畿連合義陳)을 기획하고 총대장으로 당대의 거유 허위(許蔿)를 초빙하여 의병운동의 확대를 꾀하였다. 계획이 적중하여 인근 의진의 의병장 김규식(金奎 植)ㆍ연기우(延基羽)ㆍ황순일(黃淳一)ㆍ황재호(黃在浩)ㆍ이인영(李麟榮)ㆍ박종한(朴宗漢)ㆍ 김준수(金俊洙)ㆍ이종협(李鍾協)ㆍ이홍응(李弘應) 등을 규합할 수 있었다. 9월 중순 왕회종 ㆍ김진묵 의진은 적성(積城)ㆍ삭령(朔寧)ㆍ안협(安峽)ㆍ토산(兎山)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의 병을 소모하자 이곳 주민들이 자진 응모하여 그 수가 4백여 명에 달하였다. 특히 김진묵 의 부대는 일본 보병 제52연대 1중대와 대치하여 적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그즈음 이은찬(李殷贊)ㆍ이구재(李九載) 등 의병장이 경북 문경(聞慶)에 살던 이인영(李麟榮)을 총 대장으로 추대하고 '13도연합의병부대'를 구성하여 의병 운동의 전국적인 연합작전을 기획 하였다 이에 허위(許蔿) 이하의 의진은 진동유진소(鎭東留陳所)로 재편되고 허위는 진동창 의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군사장(참모장)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김진묵 의진의 활 약상은 '13도연합의병부대'의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연합의진의 서울 진격은 1908년 1월 28일(음 12월 25일) 총대장 이인영의 귀향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여 전년 이래 이곳에서 활약하고 있 던 조인환(曺仁煥)ㆍ권준(權俊)ㆍ김진묵의 의병 부대와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으로 이 동 합류한 의병 부대는 박종한(朴宗漢)ㆍ김수민(金秀敏)ㆍ김응두(金應斗)ㆍ이은찬(李殷瓚) 의병부대 등이었다. 이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병부대를 재정비함으로써 여기에 임진강 유역의 연합의병 부대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지평ㆍ가평ㆍ적성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대내적으로 전국 의진의 연합전선을 재차 모색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경현수 (慶賢秀)를 파견하여 중국 혁명당에 밀서를 보내어 군사원조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허위는 의진연합의 꿈을 실현하기 전에 1908년 6월 경기도 영평군 유동(永平郡 柳洞)에서 체포되고 이어서 1908년 10월 서대문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김진묵은 이에 좌 절하지 않고 1908년 말까지 인천(仁川) 일대에서 집중 활약하였다. 일제의 소위 ‘폭도토 벌작전’이 극에 달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등으로 활약하였다 하나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558~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