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page

106 류인석(柳麟錫) 의진에 가담하여 충청도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김재관은 청일전쟁 중 일제가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더니 급기야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였다. 더욱이 일제가 친일 개화파 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 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기에 그는 국모보수(國母報讐)와 토역복수(討逆復讐)의 기치를 들 고 류인석 의진에 참여하였다. 류인석 의진은 1986년 3월 초순 충주(忠州)에서 퇴각하고 충북 제천(堤川)으로 들어가 적의 병참기지를 쳐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수안보(遂安保) 및 가흥(佳 興)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에 의병장 류인석은 이강년을 유격장(遊擊將) 에 임명하여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수안보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피아 의 요새로 의병의 맹공격으로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강년은 다시 새재를 공 격하기로 하고 일단 퇴군하였다. 그 후 3월 26일 새재에 당도하여 적의 무기고를 부수고 화약・탄환・유황・조총 등 병기류 92점을 노획한 뒤, 동원(東院)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적의 기습을 만나 다시 덕주(德周) 근처로 퇴진하였다. 여기서 이강년은 군사를 거느리고 새재 아래로 왕래하면서 출몰하는 적군들을 공격하여 적의 도량(跳梁)을 방지하는 한편, 종군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위문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기를 고무시켰다. 그리고 4월 초(음력 2월)에는 다시 전군장 홍대석과 약속 하여 수안보의 적진을 맡아 공격하고, 이강년은 새재의 요해처로 나가 지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홍대석이 약속대로 하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충주 장현(獐峴)까지 나왔다가 적의 기습을 만나, 김재관을 비롯하여 추성손(秋聖孫)・김용주(金用胄)・박원용(朴元用)・우재봉 (禹在鳳)・오문용(吳文龍)・우규하(禹圭夏) 등 휘하의 의병 10여 명이 전사하게 되었다. 이에 홍대석은 회군하여 서창(西倉)에 유진하게 되었다. 김재관 등이 전사한 후인 4월 17일 우선봉 김운선(金雲仙)이 이들 순국 용사의 시체를 찾아 돌아오다가 다시 적을 만나 도망하게 되었다. 이 때 간악한 적들은 시신을 칼로 난 자하고 게다가 불로 태워서 그 형체를 분간할 수 없도록 하였다. 용감히 싸우다 순국한 김재관 등 순국 용사들에 대해 『창의견문록(倡義見聞錄)』에 실린 제문에는 "아! 사람이 세상에 나서 도망하기 어려운 것은 의리다. 그런데 고금을 통해 의 리로 싸워 죽은 자가 오늘날 같은 적이 없었다. (중략) 슬프다. 이 국적놈들이 화친을 부 르짖어 임금님을 위협하고 여러 신하를 우롱하더니, 마침내 국모께서 시해를 당하시고, 임금께서 머리를 깎으시게 되어, 큰 둑이 한 번 무너지매 인류가 금수로 돌아가고, 예악 이 분토(糞土)에 빠졌으니 이는 천지간에 처음 있는 큰 변고였다. (중략) 아! 전번 충원(忠 原) 싸움에서는 외로운 성과 약한 군사라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짐짓 후퇴하여 군기를 수 선하고 무력을 단련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틈을 노리던 차, 불행히도 너희들이 저놈들의 악독한 칼날을 만나 같은 때에 싸우는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겸하여 불에 타서 형상을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