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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형은 충청남도 보령(保寧)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어난 홍주(洪州) 의병에 참가하여 유준근(柳濬根)과 함께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이 일본 관헌에 체포되자, 김일원(金日源)과 함께 협의하여 33인의 의사를 계승하여 독립을 획득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였다. 3월 12일 13도 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우리들 이천만의 요구이다. 우리들은 손병희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요구한다." 는 취지를 기술한 애원서(哀願書)라고 제목을 붙인 문서 2통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1통을 조선 총독에게 가지고 가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예심부에서 예심종결결정(豫審終結決定)되고, 이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대표 137명 중 1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