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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근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인으로서 충청남도 보령(保寧)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관리들에게 "전곡갑병(錢 甲兵)이 모두 저 오랑캐의 것이 되었는데 너희들은 세금을 누구에게 바치려는 것이냐" 고 하며 납세를 거부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이처럼 침략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것으로 주변 일대에서 유명하였다. 1906년 5월 전 판서인 민종식(閔宗植)이 의진을 이끌고 서천(舒川)읍을 거쳐 비인(庇仁)·판교(板橋)를 지나 남포(藍浦)에 이르자 유준근은 민종식을 찾아갔다. 민종식 의진이 4일간 남포에 유진하는 동안 서로 구국전략을 의논하였으며, 민종식의 초청을 받아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종군하였다. 이때 일군과 관군이 황제의 명을 빙자하고 의병들의 해산을 종용하여 서로 담판이 있었다. 그러나 적들이 의병진의 담판사절을 가두고 보내지 않았다. 이에 유준근은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서 의리로 따져 적의 기개를 꺾고 결박되어 있던 의병 사절을 풀어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유준근은 종군하여 보령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5월 19일 홍주(洪州)로 진격하여 홍주를 함락시켰다. 입성한 후 부서를 확정하였는데 유준근은 유병장(儒兵將)에 임명되었다. 의진은 수성을 위하여 사방으로 소모활동을 하는 한편 적의 대공세에 임하여 부서를 재편하였다. 이때 유준근은 윤상봉(尹相鳳)·채광묵(蔡光默)·이상두(李相斗)와 함께 참모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이 점차 심화되자, 의진은 적의 지속적인 공격에 힘이 진하여 5월 31일 새벽 3시에 성문이 무너지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80여 명이 순국하고, 79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해 7월에 황제의 특지로 70명이 석방되고, 유준근을 비롯하여 남규진(南奎振)·이 식(李 )·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 9명은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어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할 때 윤석봉과 유준근은 "우리들은 강약(强弱)이 부동하여 잡혔으나 의로써 거병하였던 것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일본 음식을 받아먹을 수 없다" 고 하면서 단식하여 의병들의 구국 항일의 기개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특히 유준근의 성품이 강직하여 적들이 꺼려했으므로 남규진·이 식·신현두와 함께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들이 대마도로 유배된지 한 달여 후에 태인(泰仁)·순창(淳昌)에서 의거하다가 체포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안병찬(遯軒 安炳瓚)이 유배되어 왔다. 이곳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이때 유준근은 면암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로써 화답하였다. "고국에선 아무도 이 길 와 본 일이 없으니 일변 기쁘고 일변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 다 함께 대의(大義)를 붙들기 위해 조용히 나갔던 것이니 깊은 수치 쾌히 푸른 바다 소리에 씻어나 보세" (故國無人駐此行 不勝一喜一悲情共扶大義從容就 快洗深羞碧海聲) 이들은 대마도에서도 우리 고유의 복색을 변치 말 것을 약속하고, 일본인이 제공하는 음식과 의복을 거절하고 고국에 부탁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과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유준근의 백관형(白觀亨)·송주헌(宋柱憲) 등 10여 명과 함께 서울 수창동(壽昌洞) 여관에 모여 융희황제를 복위시켜 민심을 수렴하고 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강산도 전과 같고 궁실도 전과 같고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의 위에 좌정하여 일국을 호령하고 각국에 통보하십시오" 라는 내용의 글을 지어 가지고 3월 5일 청량리로 나가 융희황제가 우제(虞祭)에 나가는 도중에 글을 올리다가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이 일로 체포되어 11월 6일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33인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유림대표들도 파리강화회의에 서한을 보내자는 운동에 참여하여 서명한 137인중 1인이 되었다. 이때 유준근은 전라남북도를 책임 맡고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써 설유하였다. "이번 독립선언이 이미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나 그 선언서에 연서한 사람 중에는 유감스럽지만 우리 유림이 일인도 참가치 못했다는 것은 천고에 있을 수 없는 수치가 아닙니까· 이 치욕을 씻으려면 유림의 중망(重望)을 갖춘 선생이 지도하여 지금 서울에 있는 경향사우(京鄕士友)가 중심 되어 전국을 망라한 대유림단을 조직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단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국제 승인을 요청하려는 계획이 비밀리에 준비중에 있으므로 선생의 지도를 바라고 내려와 간청합니다" 그러나 간재는 "이제 독립 운동을 전개한 33인이 자칭 민족의 대표라 이들은 모두 이단에 속한 천도교·예수교·경교·불교인만으로 연서되었으니 어찌 우리 민족의 대표로 인정하겠는가· 우리 유림단이 그러한 이교인을 따라 종사하려 함은 도리어 큰 치욕이 될 줄 안다. 우리 유자에게는 오직 國難亡道可亡萬也不昻의 법문이 있으니 마땅히 그 법문을 따라 수사선도(守死善道)할 뿐이오, 독립운동이라는 미명에 빠져 이교인의 뒤를 따라서는 안된다"고 도리어 유준근을 훈계하였다. 이에 유준근은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립사상을 전개하였다. "선생이 유림 영수라 하여 안자존대(安自尊大)한 생각을 품어 민족 대표 33인을 오히려 이단이라 배척하고 국가 독립운동에도 참여치 않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의 반역자이며 우리 유림단의 반역자다. 선생의 소위 수사선도(守死善道)는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국가를 사랑함이란 천리(天理) 당연의 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면 죽음이 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국가와 민족을 모르는 도가 과연 유림법문(儒林法門)의 어디에 있으며 70년이나 공맹서(孔孟書)를 읽은 선생이 오히려 공맹법문(孔孟法門)을 버린 죄인이 되려는 것입니까· 선생과 같은 유림이 있어서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발아래 난장판이 된 것이 아니오! 오랑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반대함은 스스로 오랑캐 됨을 감수하라는 것이니 인지무량호불서사(人之無良胡不瑞死)란 옛말이 선생과 같은 기세도명배(欺世盜名輩)를 가리킨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상의 사상에서 볼 때 전통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에서 크게 벗어나 공맹의 도보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근대적 민족주의로 전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에 홍주의진의 활약상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 그리고 면암 최익현의 최후에 관하여 문집을 지었는데 그 제목은 「마도일기(馬島日記)」라 하였다. 이 책은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