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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춘수요 자는 명옥이오 호는 청오며 성은 정씨로 광주후인이다. 기미독립운동의 민족대표인 33인중의 한분이시다. 공은 명문출신으로서 고 휘 석준은 임고산 문하에 업을 닦아 학행과 효우로 성예가 높았다. 공은 고종 을해 서기 1875년 2월 11일에 청주 향제에서 태어나시었는데 천자가 탁이하고 풍의가 준수하시었다. 일찌기 정훈을 받들어 약관에 이미 경사에 박통하고 경세에 뜻을 두어 정차 그의 온축을 발휘하려 하시었다. 그러나 세운의 쇠함을 따라 국보가 날로 위태롭게 되매 공은 개연히 구국의 뜻을 품고 활동무대를 찾아 해외로 향하다가 원산에서 미국 선교사와 만나시었다. 거기에서 고은 다시 깨달으신바 있어 마침내 기독교안에 들어가 그의 소지를 펴보기로 결심하시었다.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서기 1919년 1월에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김족자결주의가 창도되자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 지사들 사이에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움직여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연합전선이 이룩되었다. 당시 공은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를 맡은 관계로 동북지방에 있어서 독립운동의 총책임을 담당하고 각지의 동지와 연락하여 거사의 준비와 절차를 진행시킨 다음에 서울로 올라와 여러 동지와 함류하시었다. 공은 마침내 왜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감옥가 마포감옥에서 3년간의 복역을 치루시었거니와 출옥후에 공은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혹은 설교와 강연 혹은 사적훈도를 통하여 많은 애국청년들의 심금을 울려주시었다. 그 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한인에 의한 일제의 잔인한 박해는 더욱 심하던차에 일찌기 공과 여러 지사들이 중앙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비밀히 결사한 흥업구락부사건이 탄로되었다. 풍진에 시달린 백수의 공은 또다시 서대문경찰서에 피검되어 삼복염열에 15일 동안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은 결과로 신경통과 심장병을 얻어 오랫동안 신음하시었다. 그 뒤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신태 서기 1950년에 6.25사변을 만자나 난을 피하여 고향인 청주의 족손 인완의 집에 내려가 계시다가 그 이듬해 10월 27일에 향년 77세로 서거하시니 충북유지들이 모여들어 사회장으로 궁현의 선영하에 모시었다. 공은 50년에 걸친 신앙생활에 많은 업적을 쌓으시면서 감리교와 감독의 성직을 역임하시었으며 만래에는 신앙차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시었다. 공은 품성이 강직호매하여 평생에 부심의 일을 하지 아니 하시었으며 3.1운동이후로 여러번 옥고를 겪으시었고 교회의 육성발전에 크다란 공헌을 하시었으나 이를 무두 자가의 분내사라 하여 한번도 그 공과 노를 자긍하지 아니 하시었다. 그리고 때로는 시무하는 자도 있었으나 한결같이 충서로서 대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그의 아량에 경복하였다. 공의 초배인 안동김씨는 아들이 없는채 조졸하고 계배 안동임씨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장자 화국은 백부에게 출계하고 차자는 화민이오 삼자는화세며 녀 화숙은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