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page


204page

경현수는 서울 출신으로 평북(平北)에서 살았으며 성균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2차 의병전쟁 때에 허 위(許蔿)의 의병진에 소속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소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에 경현수는 그해 봄 전국의 뜻 있는 유학자들로 조직된 13도 유약소(儒約所)에 가담하여 국왕께 상소하고 대신들에게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권고하는 등 여론 조성에 앞장섰던 김동필(金東弼)과 이봉학(李鳳學) 강원형(姜遠馨) 등과 함께 궁문 앞에 나가 글을 올려, 일인들의 횡포와 을사5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으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 이 5조약이라는 것은 한 나라를 영영 망하게 하는 기틀입니다. 더구나, 황상께서 불가(不可)라 하고, 정부 주무의 참정 대신이 불가라 하고, 국민이 모두 불가라 하는데, 가(可)자를 쓰는 대신을 어찌 폐하의 신하라 하고 정부 대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hellip&hellip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은 외교를 맡은 주무 대신으로서 압제에 의하여서라고는 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인장을 찍었으니 어찌 매국의 죄목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외의 여러 대신도 처음부터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오다가 오늘의 화를 조성하였고, 반역의 행동이 결국은 가(可)자를 쓰는 자리에서 드러났으니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열성조(列聖朝)와 황상폐하의 역신(逆臣)이오니 국법이 있는데 어찌 법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만일 그대로 둔다면 3천리 강토가 다시 대한의 소유가 될 수 없사오니, 폐하는 장차 종묘 사직을 어느 곳에 두시렵니까. 억만 백성을 뉘 집으로 보내어 노예를 만들려는 것입니까&hellip&hellip. 아울러 이들은 역적의 무리들을 머리 베어 거리에 달아서 백성들의 경각심을 촉구하고 각국 공사관에 통고하여 조약을 무효화할 것을 요청하며, 한편으로는 직접 공함(公函)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어서 조약의 무효화를 위한 투쟁을 벌이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용천(龍川)을 중심으로 의병 운동을 전개하던 전덕원(全德元)과 함께 활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활약하던 평안도 방면에는 일찍이 초기 의병 때에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이 지방의 충용(忠勇)한 인사들을 모아 재거(再擧)할 것을 계획하였던 곳이며, 의암의 의병진이 이 지방을 지나 국내로 왕래하는 중에도 많은 지방 인사들의 동조(同調)를 얻었던 곳이다. 더구나 개천(价川)의 숭화재(崇華齋), 용천(龍川)의 옥전재(玉田齋) 등을 중심으로 의암에게 사사(師事)받은 선비들이 모여서 도학을 강론하고 국가 대사를 논의하던 전통의 고장이다. 그와 같은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활약하던 경현수는 1908년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총대장인 허 위(許蔿)의 부대에 종군하게 되었다. 그 해 2월 경현수는 대장 허 위의 지시에 따라 청국혁명단(淸國革命團)에 군사원조를 청하는 밀사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