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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1896년 의병항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뒤 유복자를 기르다가, 3ㆍ1운 동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서로군정서에 참가 한 뒤로 많은 활동을 펼쳤는데, 가장 격렬한 의열투쟁을 펼친 장면은 일제 가 만주를 침략하던 무렵부터 펼쳐졌다. 1931년 11월 김동삼이 하얼빈에 서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탈출시키려고 나섰고, 이듬해에 국제연맹이 만주 침 략에 대한 조사단을 파견하자, 손가락 마디를 잘라 혈서를 써서 보냈 다. 또 1933년 만주국 건국 1주년 행사를 앞두고 부토 일본대사를 격살하 려 고 폭탄을 운반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음 직전에 풀 려났고, 바로 그 직후에 순국하였다.(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발표 참고) 3) 3ㆍ1운동에 앞장선 여성 3·1운동은 전 세계에 한국이 독립국가라는 사실을 선언한 일이다. 이 로 써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 국 을 독립국으로 승인해달라고 요구한 것이고, 그 승인 여부와 관계없 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임시정부 (정 부)와 임시의정원(국회)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세계 식민지해방투쟁사에 서 가장 선두에 나선 선언이자 실천이었다. 경북에서는 3월 8일 대구 서문밖시장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 를 부른 것으로 시작하여 5월까지 대부분의 시군에서 전개되었다. 여기에 나 섰다가 옥고를 치르고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은 모두 네 사람이다. 먼저 김락金洛은 안동 내앞마을 출신으로 하계마을에 시집가서 독립 운 동 3대 명가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김락은 협동학교에 집을 내놓 기 도 한고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망명한 김대락의 막내 여 동 생이다. 그녀는 예안의 선성의병장을 지내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단 식 순절한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만주로 망명한 석주 이상룡의 처제이기 도 하다. 남편 이중업은 파리장서의거의 주역이었고, 두 아들은 광복회와 제 2차 유림단의거, 두 사위는 만주지역 독립군 기지 지원과 사회운동에 나 섰다. 이처럼 독립운동가 3대를 지탱해 나간 배경에 바로 김락이 있었 다. 그는 스스로도 투쟁에 나섰다. 1919년 3월 17일 예안에서 펼쳐진 독립 만 세운동에 앞장서다가 일본경철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두 눈 을 모두 잃고 11년 동안 고초를 겪다가 1929년 2월 사망하였다. 전통 명 가 의 안주인이 독립운동 3대를 지키면서 아울러 스스로 독립운동에 나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