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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사리 산 286번지는 없는 번지이다. 저 지도를 중심으로 좀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이관은 경남 산청(山淸) 사람이다. 1919년 당시에는 서울 가회동(嘉會洞)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천도교 전도사 및 편집원(編輯員)으로 손병희(孫秉熙)·이종일(李鍾一)과 함께 3·1독립운동을 일으키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이종일에게서 대한독립의 취지를 듣고 손병희 등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의 배부를 승낙하고 지방으로부터 상경한 대표에게 이를 배부하며 활동하는 동시에 3·1독립운동 당시 배부한 격문 기초자(檄文起草者)로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형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으나 미결기간으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2년 11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군축문제(軍縮問題)를 다룰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한국의 독립을 승인케 하고자 임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구미위원장 서재필(徐載弼) 등에게 대표권을 주어 외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며 대한독립의 승인을 요청하는 독립청원서에 국민대회(國民大會) 대표의 자격으로 서명하고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