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age

편저:박상건 唐津文化院 한편국내․외의독립투사와독립군의활동에자금이필요한것을알고사재는물론뜻을 같이하는 전국의우국지사들과독립자금모금운동에적극적으로참여하여,다시한번왜경에체포되었 다. 1921년내란죄로기소,同年4월공판송치된후연6월에대전지법공주지원으로부터징역8개월에 3년간집행유예의형을언도받아혹독한옥고를치르면서다시한번독립의의지를다지게 된다. 당시일본은그들의식량난해결및군량미조달을위해동척회사를이용농사자금대여라 는미명아 래우리농민들의미작물을마구수탈하기에이르렀다. 또여기에만족하지않고급기야는일본농민들까지다수이주시켜농토조차도빼앗는등 우리농민들 의삶의터전까지박탈해갔다. 이렇듯일제의식민지정책이날로포악해지고노골화됨에따라우리농민들은더욱도탄 에빠지게되 었다. 이에분개한李지사는그들의농토에관개가불가능하도록수리를방해함으로써일본인 의미작경영 을방해,일제의침략에부단히저항했다.이일로인해1927년피소되어1928년경성복심 법원으로부터 벌금백원형을받았다. 이강인지사는이와같이태형,실부형등의갖은탄압을받아요통,방광염등의고통을 겪으면서도 일제의탄압에굴하지않고오직나라의독립을위해자신의젊음을불사른인물로일본경 찰의감시가 극에달하자그토록사랑하는고향을떠나1934년봄당진군당진읍수청리로이주,이곳에 서도농민들 을계도하는등우리나라가해방을맞는그날까지나라와민족을위해온힘을기울인인물 이었다. 15.이철영(李喆榮) 항일의사(抗日義士),字는윤숙(允淑)이요,본관은연안(延安)이다. 서기1884년(고종21년)2월20일서산군음암면도당리에서출생하였다. 서당에서한문등구학문수학(舊學問修學)26세되던1910년8월29일,한일합방소식이 전해지자 크게놀라사실여부를확인하고자서산읍내로가보니사내정의(寺內正毅)총독의고유문(告 諭文)이고시 판(告示板)에게시되어있음을확인하였다.그순간격분을억제하지못하고고유문을찢어 버리고고시 판을파괴해버린후왜놈들을모조리없애버린다고서산경찰서로들어가자왜경에게체 포되어3개월 간구속되어유치(留置),그후왜경동엽(桐葉)과산기(山崎),한국인순사보이현석(李賢錫 )에게끌리어 공주감옥으로호송도중이현석이용변차(用便次)길옆으로들어가자그가보이지않는곳 으로피신하 면서포승을끊어버렸다.왜경이깜짝놀라차고있던칼을뽑아의사(義士)의머리를내 리쳤다.그 순간의사는맨손으로칼을잡으며빼앗아호승하던2명의왜경을(桐葉과山崎)모두살해 하였다.달려 온한국인순사보이현석에게는“너는우리동포다.그대로살려준다.”고호령하니그는도 망해버렸다. 그때정신을차려보니왼손의손가락4개가잘려나가고,머리에는많은파멸상을입어선혈 이낭자하였 다.이에지혈을하려사방을살펴보니연기나는곳이있어그곳으로뛰어가니숯굽는곳이 므로숯굽장 이가크게놀라입고있던바지저고리속의솜을꺼내태워지혈을시켜주었다.그때“수비 대가곧출동 하면수색할텐데누구의집으로데려다주면살려줄친구가있겠느냐?”고물었다. 이에그는“정미면수당리안국산속의구문도(具文道)에게데려다주면살겠다.”고하자 숯굽장이는 숯섬속에넣고위에는숯으로덮어서위장해가지고구문도집에데려다줬다.거기서반 년간치료하 여상처가완치되었는데그후그곳을떠나계룡산을거쳐,거기서다시지리산으로들어 가굴을파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연명하기10여년의세월이흘러갔다.그후송악면부곡리최숙현(아 우의처남)의 주선으로송악면기지시리흥척동노공재(盧公在)댁에와서이의연(李宜然)으로개명,행세 하면서생도 교육에전력했다. 그후송산면부곡리로서당을옮겨후진을양성하고,당진읍시곡리에서생도들을교육 할때는생도 들집을차례로돌아다니며이동식서당처럼하면서독신생활을계속했다. 청춘시절에결혼했던부인은그가은거생활중에작고(作故)하고고향을떠난30여년 만인1943년